"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2018.09.04 17:30 입력 2018.09.05 13:59 수정

아동문학계 성폭력 공론화를 위해 시작된 모임인 ‘여성+어린이+문학’은 아동문학과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일러스트 이아름 콘텐츠 기획자 areumlee@kyunghyang.com

아동문학계 성폭력 공론화를 위해 시작된 모임인 ‘여성+어린이+문학’은 아동문학과 여성주의를 주제로 한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일러스트 이아름 콘텐츠 기획자 areumlee@kyunghyang.com

“클리토리스의 구조가 해부학적으로 밝혀진 게 1998년이라고 합니다.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여성에게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키위’가 말했다. 회의실 정면에 있는 화면에 클리토리스의 해부학적 구조 그림이 보였다. 난생 처음보는 그림이다. 그동안 봐왔던 여성 생식기의 그림은 자궁과 난소가 그려져 있는 T자 모양의 그림이었다. ‘미나리’는 “외성기는 내 몸에 있지만 없는 것처럼 교육을 한다. 그것에 무지한 여성들을 만드는 성교육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저동 위워크 사무실, ‘미나리’ ‘토마토’ ‘당근’ ‘시금치’ ‘비트’ 등 과일이나 채소 이름을 단 사람들이 모였다. 아동문학을 여성주의 관점에서 고민하는 ‘여성+어린이+문학’의 5차 집담회였다. 이날 모임의 주제는 ‘아동청소년 문학에서 다루는 성’이었다.

지난달 30일에 열린 ‘여성+어린이+문학’ 5차 집담회 포스터.

지난달 30일에 열린 ‘여성+어린이+문학’ 5차 집담회 포스터.

■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자 어린이의 성에 대해 이야기하다

‘여자 아이’와 ‘성’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시돼 있는 조합이다. 금기의 이면에선 남성들이 소비하는 게임이나 웹툰 등을 통해 여성 아동이 ‘로리콘’(로리타 콤플렉스)이란 이름으로 성적 대상화되어 소비되어 왔다. 하지만 정작 청소년이 접하는 아동문학에서 여성이 주체가 된 성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더러 청소년의 몸과 성을 주제로 한 책들이 있지만 대부분 남자 아이들의 성에 관한 것이다. 여자 아이의 성은 성적 대상으로 소비될 때만 존재할 뿐, 결코 주체로 다뤄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왜 아무도 여자 아이의 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는지 궁금했어요. 어떤 생각을 하고 감정을 느끼는지 공유하고 싶었어요. 처음엔 최대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이제는 고민에 대한 길을 내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여성 청소년의 몸과 성에 대한 그림책을 준비하고 있는 ‘키위’가 먼저 화두를 던졌다. ‘키위’는 “여성의 몸에 관한 책은 임신과 출산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한 것들이 많았고, 질이랑 자궁 외 생식기 주변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전에 갔다가 할례를 당한 아프리카 소녀의 사진을 봤다. 클리토리스가 뭔지 알기도 전에 할례를 먼저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토마토’가 “아이들의 배변훈련을 위한 그림책에도 기저귀를 벗는 아이들은 100% 남자 아이다. 남자 아이의 성기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반면, 여자 아이의 성기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며 “여성 성기 자체가 음란물로 규정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보니 여성의 몸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선례를 본 적이 없다”고 말을 받았다. ‘배추’는 “문학에서 여자 아이의 성적 욕망이 어떻게 형상화되어야 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남자 청소년의 성이나 자위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는 많다. 하지만 여성의 성적 욕망은 마녀나 팜므파탈의 이미지로 한정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아스파라거스’는 “청소년기 자기 욕망, 여성 청소년이 자기 욕망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필요할 거 같다. 문학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닫혀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깨주는 것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7월에 열린 ‘여성+어린이+문학’ 4차 집담회 포스터.

지난 7월에 열린 ‘여성+어린이+문학’ 4차 집담회 포스터.

■ 아동문학계 성폭력 공론화로 시작한 ‘여성+어린이+문학’

참석자들은 왜 채소나 과일 등의 이름을 쓸까. ‘여성+어린이+문학’은 지난해 아동청소년 문학계 성폭력 사건의 공론화를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춘천교대 교수이자 아동문학평론가 김모씨의 성폭력 사건(▶관련기사 바로가기)이 터졌을 때, ‘문단 내 성폭력, 어린이문학은 안녕한가요’ 집담회를 열어 공동으로 성폭력 사건에 대응했다. 아동청소년문학계 성폭력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1802명의 서명을 받았다. 가해자가 권위 있는 아동문학평론가이고,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익명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가해자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사건이 일단락되자 지난 7월부터는 여성주의와 어린이책을 주제로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4차 집담회에서 ‘여성으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이 한 권의 어린이책’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눈 데 이어 이번엔 ‘아동청소년문학과 성’을 주제로 삼았다.

모임 참석자는 아동문학 작가, 편집자, 디자이너, 독자, 학생 등 다양하다. ‘미나리’는 “진행주체도 없고 수평적인 형태의 느슨한 모임”이라며 “서로가 속한 영역과 세대를 초월해 ‘여성주의’와 ‘아동’ 두 개의 키워드만을 갖고 모였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도 중년 여성부터 갓 스무살이 된 ‘영 페미니스트’까지 다양한 구성원 스무명이 참여했다. 각자 명함을 내려놓고 만난 자리에서 더 자유롭고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었다.

‘무’는 “평소에 만나기 힘든 젊은 세대, 작가 지망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며 “새로운 독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아동문학계는 거기에 맞게 준비돼 있는가, 예전 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건 아닌가하는 고민들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어린이+문학’은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최현희 교사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자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출처 ‘여성+어린이+문학’ 트위터 계정

‘여성+어린이+문학’은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최현희 교사에 대한 공격이 이어지자 ‘#우리에겐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 해시태그 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출처 ‘여성+어린이+문학’ 트위터 계정

■ 다양한 세대가 만나 여성주의와 아동문학을 함께 고민

‘키위’는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 그림책을 준비하면서 트위터를 통해 ‘여성+어린이+문학’을 알게 됐다. 스스로를 퀴어 페미니스트로 소개하는 ‘키위’는 “페미니즘과 아동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부족한데, 각자의 자리에서 느끼는 고민을 안전한 장소에서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이책 관련 일을 했던 ‘고야’는 “어린이책을 만들다 보면 성편향적이고 성차별적 내용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며 “이런 모임이 생기고 이야기가 활발해진다면 자신의 작업에도 반영하는 작가들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유일한 남성은 ‘비트’였다. ‘비트’는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독서를 하다가 모임을 알게 됐다”며 “모임에 나온 남성이 나 혼자다. 여성들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느낌이라면, 남성들은 가진 걸 안 뺏기려고 아등바등하는 느낌이다. 도태되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고 말했다. 그는 “유독 페미니즘이슈에서는 의견이 다르면 건설적 비판보다는 아예 덮어놓고 비난하거나 무지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먼저 알고 난 다음에 이야기하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여성+어린이+문학’의 참석자들은 각자 ‘여성으로서 이야기하고 싶은 이 한 권의 어린이책’을 소개했다.

"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산딸기 크림봉봉(에밀리 젠킨스 글·소피 블래콜 그림/씨드북)

“처음 읽을 때는 귀여운 요리책이라고 생각했어요. 다 읽고나선 감동 받아 눈물이 났죠. 300년 전, 모녀는 산딸기를 따고 크림을 저어요. 남자들은 모두 앉아서 식사하고 여자들은 시중을 들죠. 200년 전으로 가면 흑인이 크림을 만들고 식탁에는 백인이 앉아있죠. 가까운 몇년 전으로 가면 아빠와 아들이 산딸기를 사오고 함께 만들어요. 같이 먹는 사람도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평등한 관계에서 먹죠.”(‘감자’)

"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나에 관한 연구(안나 회글룬드 지음/우리학교)

열네 살 소녀 로사가 변화하는 몸과 마음을 면밀히 들여다보며 자신이 누구인지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2016년 볼로냐 가라치상 수상작이다. “아이들과 공부하는 모임을 갖고 있는데 <나에 관한 연구>를 선택하며 어떻게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야할지 많이 고민했던 작품이에요”(‘상추’)

"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클로디아의 비밀(E.L.코니스버그 지금/비룡소)

열두 살 소녀 클로디아와 동생 제이미가 미국의 큰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가출한 이야기를 그린 작품. “우아하고 멋지고 계획적인 여성 인물이 등장해요. 모험이 끝나고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작품이어서 좋았어요.”(‘고사리’)

"여자아이의 성은 왜 없나요" 페미니즘으로 다시 만난 아동문학

■인어소녀(도나 조 나폴리 지음/보물창고)

“아동청소년 성폭력과 관련해 문제가 된 ‘그루밍(grooming·길들이기)’에 관한 이야기에요. 성인 남성이 어린 아이를 위력으로 협박하면서 길들이는 것에 대해 직접적으로 성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도 잘 보여줘요. 아쿠아리움에 갇힌 인어소녀가 밖에서 온 소녀를 만나서 함께 탈출하는 이야기입니다.”(‘미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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