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인권 보호’ 고민 빠진 임세원법

2019.03.21 21:25 입력 2019.03.21 21:33 수정

‘동의 없이 개인정보 제공’ 인권위 제동…재검토 불가피

침해받는 권리와 얻을 수 있는 혜택, 신중하게 따져봐야

정신의료기관에서 퇴원한 환자의 정보를 본인 동의 없이도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통보해 사후 관리를 강화하는 ‘임세원법’(정신건강증진 및 정신질환자 복지서비스 지원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다음주 국회 법안소위를 앞두고 진퇴양난에 빠졌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 20일 이 개정안을 두고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등 환자들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인권위의 결정 취지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퇴원하는 환자들을 관리하는 체계를 현재대로 놔두기는 힘든 상황이어서 고민에 빠졌다. 정부의 탈시설 방침으로 환자들의 사회 복귀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들이 퇴원한 뒤 적절한 치료를 받고 있는지, 홀로 방치되거나 증상이 악화되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기가 사실상 힘들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는 병원이 가진 환자들의 정보를 지역 기관에 연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이 같은 방법 역시 재검토가 불가피해졌다.

■ 임세원법 논의, 어떻게 이뤄졌나

‘임세원법’ 논의는 지난해 12월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교수가 정신질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숨지면서 촉발됐다. 당시 임 교수를 살해한 환자는 양극성장애(조울증)를 앓고 있다 치료를 중단하면서 증상이 심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의료계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이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낮고 범죄율도 일반인들에 비해 낮은 것으로 보지만, 치료를 중단한 경우에는 그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 교수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날 경우, 피해자는 물론 사건을 일으킨 환자 본인도 형사처벌로 고통을 받게 된다. 이를 감안하면 본인을 위해서라도 지속적인 증상 관리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환자들이 병원에서 퇴원할 경우 지역에 있는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센터의 관리를 받기 위해서는 병원에서 환자의 인적사항과 치료경과 등의 개인정보를 센터로 넘겨야 하는데, 이는 환자가 동의하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 경우가 90%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이처럼 환자들이 퇴원한 뒤 지역 센터로의 연계가 안되고, 일부 환자들이 사각지대에 방치되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본인의 동의가 없어도 퇴원 사실과 관련 정보를 센터에 통보하도록 하는 법 개정을 추진해왔다.

■ 인권위 판단에 대한 엇갈린 시선

인권위의 판단으로 임세원법 논의는 전환점을 맞게 됐다. 인권위는 이번 결정에서 정신질환자들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은 소중하며, 임세원법은 이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확인했다. 정신질환자 가족을 둔 김모씨(79)는 “그간 언론 보도 등에서는 정신질환자들을 자꾸 범죄자 취급했는데, 환자들의 권리를 다시 인정해 준 이번 판단은 환영할 만한 것”이라고 말했다.

의료계와 정부도 인권위의 결정 취지에 동의하는 분위기다. 정재훈 한국정신보건연구회 정책이사는 “정신질환 증상이 심할 때는 이들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지만, 증상이 가라앉고 퇴원을 하게 된 시점에서 환자들의 자기결정권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인권위의 판단이 현장과 다소 괴리된다는 우려도 있다. 인권위는 환자들이 자신의 정보를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제공하지 않는 주된 이유를 ‘병원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퇴원 이후 지역사회 연계 치료를 원하지만 정보를 얻지 못해 개인정보 제공에도 협조하지 않는 것이니, 병원의 설득부터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계에선 병원의 설득만으로 연계율이 올라갈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정 정책이사는 “환자들과 지역사회의 연계에 관심없는 병원도 있겠지만, 관심을 갖고 권유하는 병원도 꽤 있다”며 “하지만 환자 대다수는 사회의 시선이 부담스럽거나, 모르는 시설을 찾아가는 부담으로 개인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인권위는 퇴원 사실을 공유한다고 해서 환자의 관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정신건강복지센터 사례관리요원 1명이 평균 70~100명의 환자를 지원하고 있다면서 센터의 인력을 보강하고 기능을 강화하는 것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정부에선 이 같은 노력이 현재 진행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전국에 500명을 확충했는데, 지방자치단체 예산이 소요되기에 인력을 빨리 늘리기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 환자와 사회를 위한 최선 선택은?

정부는 “인권위의 판단은 존중하지만 개인정보 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임세원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발의된 개정안 중 정부의 입장과 가장 가까운 것은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안으로, 개인정보 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타해 병력이 있거나 치료 의지가 약하고 재발 위험이 큰 환자로 제한하는 조건이 붙어있다. 결국 향후 국회 논의 과정에서는 개인정보 공개로 침해되는 개인의 권리와, 그로 인해 환자 본인과 사회가 얻을 수 있는 혜택들을 두루 살피는 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된다. 양자 중 어떤 것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는지, 정신질환자들의 권리와 타인들의 권리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향은 없는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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