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한국민중사’ 사건

2004.11.14 17:31

1987년 2월12일, 서울지검 청사. 잠을 자다 새벽같이 끌려온 풀빛출판사 편집부장 김명인(문학평론가, 현 국민대 겸임교수)은 초조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건인가. 때마다 잡혀 와 이런 식으로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게 답답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것저것 ‘걸릴’ 만한 구석을 남겨놓은 ‘죄’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얼마 후 검사가 들어왔다.

[실록민주화운동] 77. ‘한국민중사’ 사건

순간, 김명인은 체증이 한꺼번에 뚫린 듯한 기분이 됐다. 그거라면 얼마든지 해볼 만하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한국민중사’. 한해 전 가을, 2권짜리로 출판된 이 책은 이렇게 해서 80년대를 통틀어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된 무수한 출판탄압 사건 중에서도 기념비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사건의 중대성은 검찰 태도에서 쉽게 감지됐다. 검찰은 김명인만 잡아온 게 아니었다. 서류상 발행인인 홍석은 물론 실질적인 대표인 나병식을 연행했다. 출근 시간에 맞춰서 영업부장 조기환, 경리 최금숙, 편집부원 송찬경, 전 편집부장 박인배, 영업부원 이상돈까지 줄줄이 끌어왔다. 아무리 막가파식 정권이었지만 책 한 권을 두고 이렇게까지 나온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당시 공안검사로 이름을 날리던 김모 검사가 사건을 총지휘했다. 이 또한 당시 정권이 ‘한국민중사’를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 잘 말해줬다.

이 책이 처음부터 ‘한국민중사’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올 운명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대 석사과정을 갓 마친 젊은 사학도 도진순(현 창원대 교수)은 유기홍(열린우리당 의원),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이선희(법조인), 최민(당시 운동권 이론가) 등과 더불어 아르바이트를 하나 의뢰받았다. ‘정철 영어’에서 ‘영어 한국사’를 내고 싶은데 저본(底本)이 될 만한 책을 하나 써달라는 것이었다. 이왕 쓰는 김에 ‘재미있게’ 써달라는 주문도 받았다.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정철 영어’ 쪽에서 포기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도진순이 일부 원고를 들고 풀빛출판사를 찾았다. 민청학련 사형수라는 명함을 달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운동 경력을 지닌 나병식은 그 자리에서 오케이를 외쳤다.

일은 착착 진행됐다. 출판사 쪽에서는 선불 원고료를 지불하고 작업을 독려했다. 집필자들은 커피를 바가지로 퍼 마시면서 부지런히 작업했다. 그런데 얼마 후 집필자 중 일부가 운동권 여기저기에 관련돼 있는 바람에 도무지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박사과정에 있던 윤대원이 유기홍·한홍구 부분을 대신 담당했다.

나병식은 책 제목을 ‘한국민중사’로 하자고 말했다. 집필자들은 주저했다. ‘민중’이라는 개념이 학문적으로 아직 공인받지 못한 데다가 그것이 자칫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불필요한 오해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병식은 처음 그 원고를 봤을 때부터 이미 그 제목을 정해 둔 상태였다.

“있지, 내가 한두 해 책장사를 한 게 아니잖아? 무엇보다도 있지, 이름이 화끈해야 잘 팔린다.”

이렇게 해서 책은 ‘한국민중사’라는 거창하면서도 지극히 문제가 될 만한 제목을 달게 됐다. 만일 제목이 달랐다면?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지만, 어쨌든 책은 그런 과정을 겪으며 ‘민중’이라는 말에 거의 알레르기에 가까운 혐오증을 지니고 있던 공안당국, 그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공안통으로 손꼽히던 김모 검사의 눈길을 끌게 됐다.

그들은 이미 ‘민중’이 ‘인민대중’의 준말이라는, 그래서 당연히 북한에서나 사용할 용어라고 규정해 놓고 있던 터였다.

책이 서점에 깔린 뒤 검찰이 문제를 삼자, 학계는 물론 재야단체에서도 흥분했다. 이건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집필진이 나서서 직접 논리적 싸움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나병식은 검사와 타협을 시도한다.

“학계에 있는 친구들은 가명 처리합시다.”

집필자들은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는 제안이었다. 그 결과 검찰은 나병식을 구속 기소하고 김명인을 불구속 처리하는 선에서 사건을 일단락지었다.

재판 과정은 당연히 뜨거울 수밖에 없었다. 87년 5월29일 오전, 서울형사지법 제113호 법정에서 첫 재판이 열렸다. 처음부터 검사와 변호사 쪽 증인 사이에 학문의 자유를 둘러싼 일대 논쟁이 벌어졌다. 한승헌(전 감사원장), 조영래(사망), 박원순(아름다운 재단 이사) 등 내로라하는 인권변호사들이 변론을 맡았다. 사학계에서 이름이 높은 강만길(상지대 총장)과 정창렬(한양대 교수)이 증인으로 나섰다.

검찰 쪽에서 문제로 삼은 부분은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근·현대사 쪽을 다룬 2권은 아예 책 전체가 새빨갛게 바뀌어 버렸다. 솔직히 그들이 혀를 내두를 만도 했다. 예를 들어 책에서 5·16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였고, 그것을 주도한 것은 일본군 아니면 만주군 출신 고급 장교들이었다. 쿠데타 이후 남한은 분열과 예속과 독점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그들이 내세운 갖가지 조치와 명분도 ‘민중의 눈에는 부패와 구악의 일소란 민중의 관심을 돌려세우려는 허장성세로 비쳤고, 구악 대신에 더 큰 신악이 들어선 셈이었다’고 쓴 정도였다.

현대사의 거의 모든 부분이 이런 판이었다. 심지어 ‘5월’마저 ‘광주민중항쟁’으로 버젓이 기술돼 있었다. 정권의 시녀인 검찰이 그냥 보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래 집필자들은 학문적 차원에서 기술하다 보니 학계의 이견이 있을 만한 부분은 다소 모호하게 기술하고 넘어갔다.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출판사 쪽 입장은 달랐다. 민중사인 만큼 철저히 그런 관점을 내보여야 했다. 편집 과정에서 김명인이 출판사 쪽의 입장을 반영했다. 그는 학자들의 섬세한(?) 서술을 단정적으로 재처리하는 작업을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감행했다. 놀랍게도, 검찰은 그런 부분을 족집게처럼 잡아냈다. 광주민중항쟁 사진들을 포함한 현대사의 ‘팩트’는 거의 전부 문제가 됐다.

도진순의 기억에 따르면, 6월29일에 열린 재판에서 검찰측은 하루 아침에 태도를 돌변하는 웃지 못할 촌극까지 연출했다. 딱딱하고 고압적이던 그들 자세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다. 그날은 바로 국민적인 저항에 부닥친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이른바 6·29 선언을 이끌어낸 날이었다. 그들은 그날에야 비로소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재판부는 역사의 주체는 생산대중이라고 기술한 부분 등 33개 공소 내용 가운데 18개 항만을 무죄로 선고했다. 현 사회를 신식민사회로 규정한 부분 등 15개 항목에 대해서는 유죄를 적용했다. 나병식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불온사상을 전파하는 행위를 근절하겠다는 검찰과 재판부가 결과적으로 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본격 역사서로는 드물게 8만여권이나 팔렸다.

특히 근·현대 부분을 다룬 2권(5만부)이 많이 나갔다. 암울한 독재체제 아래 사회변혁을 바라는 이들이 주독자층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대사의 진실에 대해 그만큼 목말라했다.

풀빛출판사는 그 사건을 이렇게 회고한다.

“대낮에 회사의 전화선을 끊으며 사무실에 진입해 사장을 잡아가는 수모를 겪으며, 남은 직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공포 속에서도 정신을 가다듬어 똘똘 뭉쳐 다시 책을 만들었다. 인쇄, 제본, 배본 등 제작처와 서점도 일사불란하게 우리를 도와 독립운동을 방불케 책이 전파되었다. 책의 판매도 성공적이었다. 이때 얻은 교훈은 진부하지만 ‘자유는 쟁취하는 것’이며 ‘정당한 싸움에는 벗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었다.”(김순진, ‘우리 출판사를 움직인 책’, 한국출판인회의 인터넷 사이트)

지식인 사회는 성명과 항의, 농성으로 ‘한국민중사’를 지원했다. ‘태정태세문단세’ 식의 왕조가 하나의 역사라면, ‘농공상’과 ‘백정’으로 구성되는 민중도 당연히 하나의 역사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민중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사의 주역이라는 인식은 그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대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재판은 90년 여름 최종 마무리됐다. 그러나 ‘벗’들은 정당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왜곡된 한국사를 제대로 돌려놓으려는 노력은 ‘바로 보는 우리 역사’(구로역사연구소),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박세길), ‘일하는 사람을 위한 한국현대사’(윤대원), ‘고쳐 쓴 한국현대사’(강만길) 등으로 줄기차게 이어졌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미디어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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