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1년 - ‘분노’

눈먼 자들의 출항

2015.04.13 21:51 입력 2015.04.13 22:39 수정

무엇이 문제였나

세월호 침몰은 총체적인 부실과 무능의 결과였다. 선사와 선원, 해운 감독기관, 구조기관 모두가 규정을 어기며 책임을 떠넘긴 것이 참사로 이어졌다.

세월호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한 7건의 재판기록과 감사원 감사결과(2014년 7월)를 분석해 지난 1년간 드러난 사실을 정리했다.

[세월호 1년 - ‘분노’]눈먼 자들의 출항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제작한 세월호 선체 외부탐사 재현 결과 3D 이미지.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제작한 세월호 선체 외부탐사 재현 결과 3D 이미지.

(1) 국토해양부·항만청·한국선급·인천해경
편법·눈속임·뇌물로 항로 열리고

세월호는 출발부터 ‘편법’덩어리였다. 관련 기관이 법과 규정을 엄격히 적용했다면 청해진해운은 세월호 항로조차 개설하지 못했다. 청해진해운은 1994년 건조된 일본 선박 나미노우에호를 2012년 수입해 세월호로 이름을 바꿨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선령제한을 20년에서 최대 30년으로 완화했기 때문이다. 앞서 2008년 국민권익위원회는 국토해양부(현 해양수산부)를 인용해 “선령제한 제도로 약 200억원의 기업 손실이 초래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의 구체적 근거는 불분명하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 도입 전 인천~제주 노선에서 오하마나호 1편만 운항했다. 해운법은 여객선 수요에 비해 공급이 넘쳐 부실운항이 발생하는 일을 막기 위해 운송수입률이 25% 이상으로 기대될 때만 신규 항로를 허가토록 돼 있다.

일본 자료를 보면 세월호의 운송수입률은 원래 24.3%였다. 그러나 청해진해운은 여객 정원을 804명에서 750명으로, 재화중량은 3981t에서 3000t으로 줄인 계약서를 제출해 수치를 26.9%로 만들었다.

인천항만청은 변조된 서류를 토대로 2011년 9월 청해진해운의 증선을 인가했다. 박모 인천항만청 해사과장은 이때 30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청해진해운은 배를 사들인 뒤 2012년 11월~2013년 1월 전남 영암 조선소에서 증개축했다. 세월호는 나미노우에호 시절보다 무게는 230t, 승선인원은 116명 늘어났다.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중량이 늘면서 복원성(비행기나 배가 바람·파도로 인해 흔들렸을 때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에 문제가 생겼다. 개축 전 제출한 설계도보다 100t이 무거워졌지만 한국선급은 세월호의 복원성 검사를 승인했다.

인천해양경찰서는 2013년 2월 최종 운항관리규정 심사에서 청해진해운이 일부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는데도 통과시켰다. 감사원은 인천해경 직원 3명이 심사 6일 전 청해진해운으로부터 출장 편의와 향응을 받았다는 사실을 적발했다.

유착과 부패를 동력으로 2013년 3월 세월호 항로가 열렸다.

(2) 청해진해운
안전 담보로 무리한 돈벌이 운항

청해진해운은 편법으로 항로를 개척한 뒤 무리한 운항으로 돈을 벌었다. 안전을 희생한 돈벌이 운항이지만 아무런 통제도 없었다.

세월호는 2014년 4월16일 위험한 상태에서 출항했다. 화물은 적재기준치보다 1065t 초과했고 평형수(복원성 유지를 위해 배 밑바닥에 채우는 물)는 930t, 연료유 410t, 청수 31t을 덜 실었다. 속임수였다. 항구에서는 배가 떠 있는 깊이(흘수)를 보고 출항허가를 내준다. 화물을 많이 실으려면 그만큼 평형수를 빼야 한다.

참사 당일 화물 무게는 총 2142t이었다. 3개층 화물칸에 컨테이너 105개, 승용차 124대, 화물차 57대, 중장비 4대가 빽빽하게 실렸다. 화물은 항해 때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묶어야 한다. 하지만 청해진해운 물류팀장은 하역업체 직원에게 “화물을 무조건 많이 싣고, 컨테이너는 2단 컨테이너 상단을 로프로 둘러 묶는 방법으로 고박하라”고만 지시했다. 세월호가 진도 맹골수도 해역에서 급변침으로 기울었을 때 이 화물이 풀리면서 배가 균형을 잃고 침수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누구도 편법과 속임수를 막지 않았다. 해운조합 인천지부 운항관리자는 화물·연료적재 상태가 허위로 적힌 세월호 선장 명의의 ‘출항 전 안전점검 보고서’를 확인도 하지 않고 승인했다. 하역업체 우련통운은 화물고박 규정을 어긴 것을 두고 “청해진해운이 시키는 대로 했다. 선원들도 이의가 없었다”고 진술했다. 선장은 “화물과 관련된 실질적 통제권한이 없다”고 했다. 세월호의 원래 선장 신모씨도 고박 개선을 요구한 적이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침몰사고 3개월 전 청해진해운 전 직원이 불법운영 행태와 노동착취 실태를 청와대 신문고에 고발했지만 자신의 체불임금을 돌려받는 데 그쳤다.

인적 투자도 인색했다. 세월호 승무원 29명 중 15명이 비정규직이었다. 안전과 밀접한 기관·갑판부 소속 비정규직 비율은 70.5%(12명)나 됐다. 규정상 매달·분기별로 해야 하는 비상대비 훈련도 하지 않았다. 승무원들은 사고가 나자 우왕좌왕했다. 비정상적 경영기법은 참사의 씨앗이 됐다.

(3) 세월호 탈출 승무원들
승객 구조보다 본인 목숨이 먼저

재판에서 가장 엄한 처벌을 받은 이는 탈출한 승무원들이다. 재판부는 승무원들에게 과적·부실고박, 운항미숙, 구조실패의 전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봤다.

배는 지난해 4월16일 오전 8시30분부터 물살이 빠른 맹골수도 해역에 진입했다. 당직근무 중이었던 3등 항해사 박모씨는 오전 8시48분쯤 병풍도 북서쪽 2.8㎞ 지점에서 조타수에게 “135도에서 오른쪽으로 140도 변침(선박이 진행하는 경로 전환)하라”고 지시했다. 변침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당황한 조타수는 조타기를 급하게 돌렸다. 배는 145도로 꺾였다. 급회전의 반동으로 배가 왼쪽으로 휘청거렸다. 충격으로 화물 고박이 풀리면서 항적을 이탈했다. 이때 선장은 기관실에 없었다.

선장을 비롯한 기관부 승무원들은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1등 항해사 강모씨가 오전 8시55분 제주해상교통관제센터(VTS)에 신고했다. 관할지는 진도였지만 전날 당직 후 자다 깨 배의 위치를 착각한 탓이다. 승객과 다른 승무원들에게는 상황을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 이준석 선장은 교신 후 “구명조끼를 입고 선내에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객실 승무원들은 배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른 채 “선내 대기하라”고 방송했다.

세월호 기관실에서 승객 구조와 관련한 논의는 없었다. 1등 항해사, 조타수, 2등 항해사가 번갈아 VTS에 교신하며 “해경이 언제 오는지”만 물었다. 오전 9시25분 진도VTS 관제담당관이 “선장이 판단해 지금 승객들을 탈출시킬지 여부를 빨리 결정하라”고 하자 “탈출하면 바로 구조되나”라고 되물었다. 객실 매니저 박지영·강혜성씨가 기관실에 승객 대피명령을 요청했지만 묵살됐다. 기관부 선원들은 해경구조선이 도착하자 신분을 알리지 않고 가장 먼저 탈출했다.

승객들을 대피시키지 않고 구조만 기다렸다. 왜 그랬을까. 재판 과정에서 나온 진술을 들어보자.

“승객들이 한꺼번에 좁은 공간에 몰릴 때 혼란과 부상 가능성이 있다” “퇴선명령을 너무 일찍 내려 승객들이 바닷물에 빠질 경우 저체온증이 발생하거나 조류에 휩쓸려 실종될 것을 우려했다” “승객 피난 유도 의무는 사무·조리부 담당이다”.

한결같이 자신이 처할 위험과 책임을 가급적 피하려 한 것이다.

(4) 해경·119구조대·VTS(해상교통관제센터)
눈앞서 허둥… 법정선 거짓 진술

세월호가 가라앉던 1시간30분 동안 관제·구조기관들은 허둥댔다. 참사 이후에는 구조실패의 책임 공방과 은폐에 급급했다.

세월호 침몰을 제일 먼저 외부에 알린 이는 단원고 2학년 최덕하군이다. 최군은 급변침 사고 직후인 오전 8시52분 119에 전화를 걸어 “살려주세요. 배가 침몰하는 것 같아요”라고 상황을 알렸다.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은 해경과 3자통화를 연결했지만 최군에게 경·위도를 물어보며 시간을 소비했다.

세월호 1등 항해사 강모씨는 최군보다 3분 늦은 오전 8시55분 제주VTS에 신고했다. 제주VTS는 즉각 해경에 신고하고 완도VTS에 연락했지만 관할지인 진도VTS에는 52분 뒤인 오전 9시47분 처음 연락했다. 제주·완도VTS는 해양수산부, 진도VTS는 해경 소속으로 상부기관이 달랐다.

진도VTS는 오전 9시7분 해경의 연락을 받고서야 세월호의 항적이탈 사실을 파악했다. 세월호는 오전 7시부터 관제구역을 지나고 있었다. 당직 직원 2명이 근무해야 했지만 1명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진도VTS 직원들은 부실관제를 감추기 위해 폐쇄회로(CC)TV를 삭제했다가 검찰에 적발됐다.

목포해경은 오전 8시58분 사고 사실을 접수했다. 사고 지점에서 12마일(약 18㎞) 떨어진 지점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123정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도착할 때까지 약 30분간 해경123정과 세월호는 교신하지 않았다. 해경123정은 오전 9시30분 사고 지점에 도착했다. 즉각 구조 작업에 뛰어들지 않고 5분 동안 선체 주변을 돌기만 했다. 이후 조타실로 이동해 안에 있던 선장과 승무원들을 가장 먼저 구조했다. 해경은 침몰해가는 선체에 진입하지 않았다. 바다로 뛰어들었거나 갑판에 있던 승객만 구조했다. 오전 10시17분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했다.

해경123정이 출동 이후 세월호 승객들에게 ‘퇴선명령을 했는지’ 여부는 재판에서 쟁점이 됐다. 김경일 전 해경123정장은 “퇴선명령을 했다”고 기자회견까지 열었으나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는 “퇴선지시를 깜빡 잊어버렸다” “해경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다 “후회된다”고 했다. 함정일지를 조작한 사실도 밝혀졌다. 그는 징역 4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세월호 1년 - ‘분노’]눈먼 자들의 출항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