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러기 아빠

2017.05.05 20:56 입력 2017.05.05 21:04 수정
나리카와 아야 동국대 대학원생 전 아사히신문 기자

[별별시선]기러기 아빠

나는 올해 초까지 10년 남짓 일본에서 신문기자로 일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바쁜 나날이었다. 명목상 쉬는 날은 있었지만 실제로 쉬는 날은 아니었다. 출입처에 작은 일만 생겨도 먹던 밥을 내려놓고 달려가 기사를 썼다. 문화부에 있던 지난해에는 기무라 다쿠야가 속한 아이돌그룹 ‘스마프’의 해체 소식에 부리나케 소속사 사무실로 뛰기도 했다.

게다가 주로 서울에서 일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의 신문사에는 전근이 많다. 나도 입사한 뒤로 나라, 도야마, 오사카, 도쿄를 돌며 일했다. 회사 선후배들을 보면 배우자가 전업주부가 아닌 이상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경우가 많았다. 나도 오사카에서 결혼한 직후 도쿄로 발령 나면서, 오사카 지방 공무원인 남편과 떨어져 살았다.

지난 1월 신문사를 그만두고 곧바로 서울로 한국영화 유학을 왔지만, 도쿄에서 일할 때보다 지금 더 자주 오사카 집에 간다. 신칸센으로 도쿄-오사카를 다니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서울-오사카를 오가는 것이 교통비나 시간에서 차이가 없다. 오히려 지금은 일 때문에 느닷없이 호출되는 일이 없어 남편과 더 가까워졌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남편이 대단하다”는 뜬금없는 얘기를 한다. 어떤 남성들은 “나 같으면 (아내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겠다”고도 한다. 10년 남짓 뼈빠지게 일해 마련한 돈으로 온 유학이고, 내 미래에 대한 투자다. 일본에서 잘 살고 있는 다 큰 어른이 대단할 것도 없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내 유학을 허락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이상한 것은 어린애들을 외국으로 보내고는 홀로 떨어져 사는 한국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런 남편들을 가리키는 ‘기러기 아빠’라는 말까지 있다는 걸 나는 알았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 <싱글라이더>를 보면서다. 영화는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된 주인공과 그 가족의 해체에 관한 이야기다.

‘기러기 아빠’라는 말은 일본어에 없다. 단어만 없는 것이 아니라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애들을 외국에 보내는 일 자체가 없다. 일본인에게 외국에서 유학하는 것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고 더러 고등학생이 있다 해도 엄마가 따라가지 않는다.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뿔뿔이 흩어져 사는 사회에서, 서른이 넘은 나와 남편을 대단하다고 말할 일은 아니다. 교육 아니 출세에 대한 한국인의 욕심은 나 같은 외국인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초등학생들이 학원을 전전하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에 들어간다는 말을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쏟아붓는 교육비가 한국과 일본의 소득 수준을 고려하면 2배에 가깝다는 얘기도 들었다. 한참 놀고 싶은 나이에 학원에만 다니는 아이도, 아이를 위해 밤새도록 돈을 버는 부모들도 내 눈에는 정상이 아니다. 만약 내가 한국에서 자랐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사람을 ‘회사 인간’이라고 하고, 일본 사회를 ‘과로사회’라고 부르지만 다 옛날 얘기다. 일본은 변하고 있다. 신문사 입사 설명회를 찾아오는 대학생들도 “결혼은 할 수 있냐”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냐”고 먼저 묻는다. 나는 “결혼은 해도 같이 살기 힘들 수 있다” “육아는 남편이나 부모가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다”고 솔직히 답했다. 사양산업으로 지목받는 신문사가 변하지도 않으면 우수한 인재를 확보할 수 없다. 발행부수 1000만부 안팎으로 세계 1~5위를 석권하던 일본 신문사들도 하락세는 부인할 수 없다.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인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신문사들도 과거와는 달라졌다. 요즘 입사하는 후배기자들은 사생활을 지켜가면서 일한다.

<싱글라이더>의 주연배우 이병헌이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으니 조만간 이 영화도 일본극장에 걸릴 것이다. 일본사람들이 한국에는 ‘기러기 아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일본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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