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대자연의 마법… 신이 빚은 땅 아이슬란드

2014.10.22 21:23 입력 2014.10.23 13:11 수정
글·사진 김남희 여행작가

“아이슬란드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소수가 떠올라요. 1과 자신으로밖에 나눠지지 않는 소수는 쓸쓸하면서도 고집스럽잖아요.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소수처럼 외로우면서도 단단해 보여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아이슬란드 사진을 본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소수를 닮은 아이슬란드의 풍경은 막막할 정도로 고립무원이었다. 그 황량한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을 바닥까지 헤집어놓았다. 지금껏 그런 풍경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세계 최초의 의회가 열렸던 싱벨리어 국립공원. 이미지 크게 보기

세계 최초의 의회가 열렸던 싱벨리어 국립공원.

아이슬란드에는 ‘신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연습한 곳이 아이슬란드’라는 말이 있다.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는 동안 내내 의문이 들었다. 정말 여기가 지구인 걸까. 인간계와 천계 사이의 중간계는 아닐까.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갈색 사막, 바위와 용암이 만들어낸 검은 평원, 연기를 내뿜는 붉은 화산, 푸른 얼음 덩어리가 떠다니는 바다, 융단처럼 부드러운 초록 이끼가 드리워진 초원. 장엄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산, 온통 검은 모래로 이루어진 해변, 부글부글 끓다가 솟구쳐 오르는 간헐천, 오묘한 물빛의 온천과 투명한 호수. 고개를 넘으면 늘 낯선 풍경이 나타났다.

북에서 동으로, 동에서 서로 방향을 바꿀 때마다 다시 새로운 모습이었다.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지구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아마도 태초의 지구가 그런 풍경이 아니었을까. 인간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지구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기 전, 오랫동안 인류는 그런 자연에 기대어 살아왔을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자연에 순응하며 인류는 오랜 세월을 겸허히 견뎠을 것이다. 태초의 지구뿐 아니라 어쩌면 최후의 지구 또한 아이슬란드의 풍경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절멸한 후의 먼 미래 혹은 우주의 먼지로 소멸할 지구의 마지막 모습 말이다. 그러니 할리우드의 영화제작자들이 아이슬란드로 몰려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영화 <노아> <프로메테우스> <토르: 다크 월드> <오블리비언> <툼레이더>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비롯해 미국 TV 드라마 <왕좌의 게임>도 아이슬란드에서 촬영됐다. 더 흥미로운 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아프가니스탄, 그린란드, 히말라야로 나오는 배경이 실제로는 전부 아이슬란드에서 촬영됐다는 사실이다.

빙하가 녹아 생겨난 호수 요쿨살론.

빙하가 녹아 생겨난 호수 요쿨살론.

아이슬란드에서는 거의 모든 곳에서 지평선을 볼 수 있다. 시야는 어디로든 뚫려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대지를 채우는 건 바람소리였다. 바람은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불어와 대기를 가르며 울부짖었다. 그 바람 안에 머물고 있으면 어디선가 엘프가 나타나 땅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데려오고, 모든 것을 데려갈 것 같은 바람이 종종 불어왔다. 잿빛 하늘 너머로는 구름이 소용돌이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이토록 텅 빈 공간으로서의 자연이라면 인간의 상상력이 들어설 여지가 아직 남아있는 걸까.

아이슬란드에는 전설과 신화가 살아있었다. 트롤과 엘프, 오딘과 토르의 이야기가 어디에서나 들려왔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엘프의 존재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인구의 10%는 엘프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하고, 10%는 부정하고, 80%는 관광산업에서 엘프의 중요성을 알기에 애매모호한 미소만을 띤다나(인구의 10%라고 해봐야 3만2000명에 불과하다. 아이슬란드 전체 인구가 서울의 성동구 인구와 비슷한 32만명이니). 눈앞에 아무것도 걸리는 게 없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이 나라 사람들이 외국에 다녀오면 꼭 하는 불평이 있다. “그 나라에선 어디를 가나 나무가 시야를 가로막아 제대로 보이는 게 없어.”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의 빙하 트레킹.

스카프타펠 국립공원의 빙하 트레킹.

아이슬란드에서는 자연의 힘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사람의 삶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지와 하늘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기운에 눌려 어쩐지 입을 다물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의 얼굴에는 체념이 어려 있었다. 그 체념은 절망이 아닌 순응, 초조함이 아닌 여유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과묵한 데다 무표정해서 차가운 인상을 지닌 이들이 이야기를 나눠 보면 놀랄 만큼 다정했다. 속정이 깊었고, 유연했다. 어떤 이는 유연함이야말로 아이슬란드인의 특질이라고 했다. 시도 때도 없이 화산이 터지거나 바다가 거칠어지는 나라에서 유연하지 못하면 어찌 살겠느냐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의 유연성을 체험한 건 교통사고 덕분이었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고립된 지역으로 가던 해안절벽 길에서 차가 미끄러지며 굴렀다. 캠퍼밴이 완파될 정도의 충격이었는데 안전벨트를 매고 있던 우리 일행은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휴대전화까지 터진 덕분에 112에 구조를 요청했다. 곧 도착한 경찰차와 구급차에 나눠 탄 우리는 인근의 병원으로 이동해 진료를 받았다.

그사이 경찰은 우리가 머물 숙소를 구해놓았다. 그 모든 일이 조금의 수선스러움도 없이 이루어졌다. 그날 밤 머물게 된 마을 사람들의 배려도 계속 이어졌다. 마을의 공공수영장(아이슬란드는 거의 모든 마을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외수영장이 있다)에서는 1회 사용료가 5000원인 세탁기를 마음껏 쓰라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침수로 젖은 모든 옷을 밤새 빨고 말릴 수 있었다. 호텔에서도 체크아웃 시간을 무시하고 저녁 버스를 타기 전까지 자유롭게 머물도록 해주었다. 관광안내소를 겸하는 카페에서는 우리가 음식을 주문하면 디저트를 덤으로 내놓았다. 심지어 우리의 차량 계약 서류를 읽고, 렌터카 회사와의 미팅에 대비한 구체적인 지침을 건네주기도 했다. 이들의 배려는 요란하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지만 마음이 담겨 있었다.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이어진 렌터카 회사 직원과의 만남도 그런 분위기였다. 5년째 태권도를 배우고 있다는 그는 한국인과 만나는 일은 처음이라며 살짝 상기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폐차된 차량에 대한 손해는 보험으로 완벽하게 처리되어 우리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화성을 연상시키는 케르링가르프졸.

화성을 연상시키는 케르링가르프졸.

이방인의 눈으로 보면 아이슬란드는 자연환경뿐 아니라 많은 것들이 신기했다. 아이슬란드에 사는 스위스인이 만든 ‘외국인의 눈으로 본 아이슬란드’ 엽서 시리즈를 빌려 소개해보자. 아이슬란드는 건물의 89%가 지열을 이용한 난방 시스템을 갖추었다. 땅 속의 파이프를 통해 끌어올린 천연 온수를 틀면 진한 유황 냄새의 미끈거리는 물이 쏟아져 내린다. 미네랄이 풍부한 물 덕분에 화장품 따위 없이도 피부미인이 된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현금이 없어도 신용카드 한 장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시장에서 대파 한 단도 카드로 살 수 있고, 허허벌판의 캠핑장에서도 주인이 카드기를 손에 들고 나타난다. 제일 재밌는 건 직업을 물었을 때의 반응이다. 제각기 소방관, 간호사, 경찰 등이라고 답한 후에 한결같이 “그리고 음악을 해요”라고 답한다나. 이 나라에서는 모두가 뮤지션이라더니, 여행 중에 내가 만난 이들도 자신을 뮤지션이나 아티스트로 소개하곤 했다. 박물관에서 표를 파는 청년은 록음악을 한다고 했고, 동네 사진관에서 일하는 처녀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같이 팔았다.

모두가 뮤지션인 나라답게 수도 레이캬비크에는 특별한 음반 가게가 있었다. 12 Tonar. 아마도 여행자들이 한 번은 꼭 들르게 되는 곳이 아닐까. 이곳에서는 가게 안의 모든 음반을 자유롭게 들어볼 수 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음반을 듣고 있으면 누군가 에스프레소 한 잔을 가져온다. 뜨겁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아이슬란드의 선율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아이슬란드에 머무는 동안 나는 세 번쯤 그곳을 찾아갔고, 나올 때마다 한 장의 음반을 사들고 왔다. 모든 음악은 보편적 정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음악을 탄생시킨 공간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아이슬란드 출신의 올라프 아르날즈, 시규어 로스, 요한 요한슨, 뷔욕의 음악은 아이슬란드의 대자연 속에서 들을 때 울림의 진폭이 가장 컸다. 어딘가 몽환적이면서도 자연의 소리를 닮은 음악이었다. 바람이 모든 것을 쓸어갈 듯 몰려오는 그곳에서 듣는 그들의 음악은 배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그 풍경 속에 서서 그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아이슬란드를 다녀오면 누구나 마음의 병을 앓게 된다고 한다. 아이슬란드 음악을 들으며, 아이슬란드에 관한 영화를 보며, 다음번의 아이슬란드 여행을 준비하게 되는 병. 불과 얼음의 땅 아이슬란드는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후 얼음에 가두어놓는다. 그 봉인을 풀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 빚을 내서라도 다시 한 번 찾아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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