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회…제50장 승군을 해체하라

2000.10.01 16:58

그러나 유정의 입에서 떨어진 대답은 가등청정의 기대하고는 전혀 달랐다.

“우리 국왕께서는 일본군을 철저히 응징하라고 명령하셨소. 왜적이 바다 건너로 도망치거든 섬까지 따라가 한 놈도 남김없이 주멸하라 하셨소. 우리가 첩자를 보내 알아보니 일본에 군사 3만만 상륙시켜도 간단히 뒤엎을 수 있을 만큼 텅텅 비어 있답디다. 명나라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 뭔가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소. 그러니 그 말엔 답이 하나밖에 없소. 싸워서 우릴 이기시오”

농담에 웃음으로 화답하던 가등청정도 한바탕 싸워보자는 유정의 말에는 안색이 홱 변했다. 그는 굳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지르더니 탁자에 놓였던 문서 한장을 꺼내놓았다.

“스님, 이걸 보십시오. 이게 소서행장이란 놈이 요구하는 강화 조건이오”

유정은 가등청정이 내미는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명나라 사신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에 오간다는 강화 조건이 적혀 있었다.

1. 명나라 황제의 황녀를 일본 황제에게 후궁으로 보내주시오.

2. 관선(官船)과 상선(商船)이 서로 왕래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시오.

3. 두 나라 전권대사가 서로 서약서를 교환하도록 해 주시오.

4. 조선 8도 중 4도는 조선 국왕이 갖고 나머지는 일본에게 주시오.

5. 조선의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인질로 보내주시오.

6. 조선의 대신들이 이 약속을 지키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해주시오.

“어떻습니까, 스님?”

가등청정이 유정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1번, 2번, 3번이야 명나라하고 일본간의 일이니 내가 뭐라 말하지 않겠소. 그러니 명나라 황후를 데려다가 기생을 삼든 노비를 삼든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오. 다만 4번, 조선 8도 중 4도를 달라? 원한다면 가져 가시오”

“예? 전라도, 경상도, 경기도, 충청도를 내주시겠다고요? 스님, 통이 크십니다”

가등청정은 유정의 말을 새겨듣지 못하고 덮어놓고 즐거워 했다.

“임진년 5월, 당신들은 한양성에 둘러앉아 팔도를 나누어먹는 회의를 했다면서요? 그런데 왜 4도만 먹습니까? 황해도, 강원도, 평안도, 함경도 여기도 참 좋은 땅입니다. 다 가져가구려”

유정이 한 술 더 뜨고 나서자 가등청정의 얼굴에 발그레 화색이 돌았다.

“진심이십니까?”

“그렇구 말구요. 진주성을 칠 때 동원된 일본군이 거의 10만 대군이었다면서요?”

“그랬지요. 명호옥의 예비군을 데려왔으니까요”

“그때 우리 조선은 소서행장의 귀띔을 받고 진주성 철수령을 내렸지요. 그런데 혈기방장한 진주부 소속 군사들하고, 그 지역 의병들 수천명이 결사항전을 맹세하고 저희들끼리 싸웠답디다. 왜놈 20명씩만 잡아 죽이면 된다, 그런 결심이었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까짓 수천명, 이리저리 다 합쳐도 대략 5천이 될까말까 한 병력이 지키는 진주성 하날 치는데 며칠이나 걸렸지요?”

“열흘쯤 걸렸지요”

“그렇다면 경상도를 다 가지려면 대략 1년쯤 걸릴 것이고, 전라도는 군사가 강하니 한 3년쯤 걸릴 것입니다. 아니, 전라도 군사는 독산성 전투하고 행주대첩이란 걸 치러본 맹수들이라 한 10년쯤 걸릴지도 모르겠소이다. 충청도 또한 전란 중에 잃은 병력이 별로 없는 땅이니 역시 한 3년 걸릴 테지요. 아니지, 그이들도 금산벌로 진입하려던 소조천융경인가 하는 자의 수만 군사를 불과 몇백명으로 막았다니 그곳 역시 한 10년은 걸리겠소 그려. 경기도는 유격전을 많이 하는 의병들이 곳곳에 숨어 있는 땅이니 거기도 그리 쉽지 않을 것이오. 하여튼 이렇게 저렇게 헤아려보니 조선 4도를 가지시려면 대략 수십년 걸릴 것 같소. 그런데 당신들은 단 1년만에 10만 병력을 죽게 만들었으니 10년이면 백만, 100년이면 천만이 필요할 텐데, 그럴만한 군사는 있소?”

가등청정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고개를 뚝 떨구었다. 배석한 일본군 무장 한명은 숫제 한숨까지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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