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눈쌀 정미기 개발한 탁창송씨

2000.10.0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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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인 탁창송씨는 참 어눌한 사람이다. 말도 잘 못할 뿐 아니라 속내를 드러내는 데도 그렇게 서툴 수가 없다. 근 40년 전 살림살이 하나 없이 단돈 80원을 들고 아내와 어린 딸과 함께 고향을 떠나온 얘기를 할 때도, 십수년 전 전재산을 들여 무공해 고춧가루 분쇄기를 개발했으나 관련법이 제정되지 않아 폭삭 망했다는 얘기를 할 때도 그의 얼굴에선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 그의 가슴은 부푼 꿈으로 충만해 있다. 자신이 만든 쌀눈쌀(胚芽米) 정미기가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우리의 먹거리문화를 뒤바꿔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꿈.

탁씨의 고향은 강원도 홍천이다. 논 100마지기에 정미소까지 갖고 있는 부농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몸이 무척 약했다. 그래서 부모는 ‘늘 봄만 같아라’는 뜻의 만춘(萬春)이란 이름을 지어주어 아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소년 만춘은 몸은 약했으나 머리는 총명했다. 특히 기계에 관심이 많아 기계 관련 서적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하지만 그의 공식 학력은 중졸에서 끝난다. 6·25전란 탓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시골 고등학교에서는 기계에 대해 더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횡성에서 중학을 다닐 때 “달에도 지구처럼 자장이 있느냐”고 질문했다가 선생님에게 불려가 혼난 적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집안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니어서 학업을 계속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정규교육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20대 이후 지금까지 농기계 기술자의 외길을 걸어왔다.

탁씨가 40년째 살고 있는 강원도 원주 일대에서 그는 ‘박사’로 통한다. 도정기·양수기·경운기 등 농기계는 물론이고 선박엔진에 이르기까지 기계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쇠를 떡주무르듯 다룬다는 그이지만 세상사에는 영 젬병이었다. 남들은 3년이면 마치는 군대를 8년이나 복무한 것도 그의 성격 때문이었다. 탁씨의 기계 다루는 솜씨에 탐을 낸 공병부대장이 그를 주저앉힌 것이다. 기술자로 성공하기 위해 배가 많은 인천으로 가려던 당초 생각을 실행하지 못하고 원주에 눌러앉은 것도 성격 탓이었다.

원주에서 농기계 기술자로 이름을 날리면서 탁씨는 두차례 큰 사업 기회를 맞았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한번은 1970년대 초, 농림부의 권유로 왕겨 분쇄기를 만든 것이었다. 쌀 도정 과정에서 나오는 미숙미와 왕겨를 한데 모아서 갈아 가축사료로 쓴다는 계획이었다. 1년반 동안 무려 43대의 시제품을 거쳐 분쇄기 개발에 성공했으나 그동안 정부의 사료정책이 외국산 옥수수·밀의 수입으로 바뀌면서 탁씨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두번째는 80년대 초의 무공해 고춧가루 분쇄기 개발이었다. 고춧가루에 녹슨 쇳가루가 엄청 포함될 수밖에 없는 기존의 무쇠 주물 분쇄기를 대체하자는 것이었으나 주물 분쇄기의 사용을 금하는 식품가공법의 제정이 무산되면서 탁씨의 발명품은 무용지물이 됐다. 게다가 자신의 발명특허를 유지하기 위해 12년 동안 엄청난 액수의 특허료를 물면서 그는 파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에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기회가 찾아온 것은 지난해 말. 서울에서 웬 사람이 그를 찾아왔다. 탁씨보다 10년 연하의 언론인 출신이라는 그 사람은 탁씨에게 쌀의 씨눈을 남긴 채 백미를 깎을 수 있는 정미기를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쌀눈쌀 사업은 단순한 돈벌이가 아니라 생명운동이라고 역설했다. 생명보다는 이윤을, 질적 향상보다는 양적 팽창만을 추구하는 오늘의 세태를 바꾸어놓는 데 쌀눈쌀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탁씨의 첫번째 대답은 “이제 때가 됐을까요?”였다. 그 자신도 젊어서부터 쌀눈쌀을 가슴 속에 품어왔기 때문이다.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맛있으면서도 영양가 높은, 한마디로 생명을 살리는 쌀이 그의 꿈이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의 쌀은 더이상 ‘밥이 곧 하늘’이었던 옛날의 쌀이 아니다. 통일벼 등 증산 위주의 육종에만 힘을 쏟다보니 밥맛은 형편없어졌다. 증산만 중요시하는 풍조는 건조·도정·저장 등 가공과정에도 이어져 쌀의 품질은 말씀이 아닐 정도로 나빠졌다. 89년부터 6년간 정부 차원에서 ‘슈퍼 라이스 프로젝트’를 추진, 맛과 영양이 뛰어난 쌀을 잇따라 개발하고 있는 일본에 비하면 우리 쌀은 상대도 될 수 없었다.

탁씨는 그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미는 쌀의 전 생산과정에서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쌀눈쌀의 보급이 자신의 꿈을 펼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이미 3년 전부터 쌀눈쌀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지 않은가.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생각도 들었다.

쌀눈쌀이란 간단하게 말해 백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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