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투기꾼?…뚜쟁이 화상 공모시장 쥐락펴락

2002.03.01 17:18

뚜쟁이는 원래 만남을 주선하고 떡고물을 챙기는 게 일이다. 미술에서는 화상이 바로 그런 직업이다. 이를테면 전문분야에서 눈썰미 하나 갖고 먹고 사는 게 화상과 뚜쟁이들의 공통점이다. 화상은 또 화가와 구매자의 궁합을 맞추는 데 두 마디가 필요 없는 부킹 황제들이다. 이런 선수들이 화가와 공모해서 미술거래시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뒷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피카소 만들기’. 책을 쓴 이는 그 동네에서 알아주는 마당발이고, 역자(이혜원·미주리대 미술사 박사과정 수료)도 참하게 골랐다.

때는 바야흐로 20세기 초. 미술 증시의 장세를 주도하던 파리가 세계대전으로 급전직하하고, 전쟁 특수로 한몫 본 자본주의가 뒷심을 발휘하던 미국에 겁없는 큰 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프랑스의 내수 거래에 한계를 절감한 화상들은 당시 짭짤한 우량주를 싹쓸이해서 미국으로 눈을 돌린다. 그 가운데 최고의 블루칩은 단연 피카소. 현대 미술의 지형을 들어 엎은 괴물이었다.

화상과 화가는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다 미술품 거래에 선진 경영기법을 도입한다. 먼저 시장과 잠재 구매자의 수요취향을 분석하고, 그들의 입맛에 딱 맞는 제품을 생산한다. 피카소가 현대 미술의 선구 양식으로 격찬받던 큐비즘에서 손을 털어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 가지곤 재미를 보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그 대신 다락에 먼지에 쌓인 채 처박혀 있던 고전주의 양식을 다시 끄집어낸다. 예술적 의무감보다는 수익창출효과가 먼저였다. 이렇게들 짝짜꿍이가 잘 맞으니 얼뜨기 수집가들 사이에서 피카소의 주가는 연일 폭등할 수밖에. 이것은 또 ‘걸인의 자유, 재벌의 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던 욕심쟁이 피카소의 평소 야심하고도 정확히 일치했다. 예술적 자존심을 고수하던 동료 작가들 몸값이 늘 제자리걸음이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이들은 기왕 투기꾼으로 나선 김에 언론도 주무르기로 했다. 고분고분한 평론가들에게 선물공세를 펴는가 하면, 기자를 집에 데려다가 밀착관계를 맺는다. 피카소도 어느새 제왕 화가 티치아노나 루벤스 부럽잖은 예술 귀족이 되어 있었다. 풋내기 기자 마르탱이 피카소를 다락방에서 사글세 사는 꼬질꼬질한 빵떡 모자인 줄 알고 갔다가, 갓 면도를 마친 세련된 댄디가 명품 가구로 도배한 아파트 거실에서 실크 파자마 차림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고 집을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그후 화랑과 화가의 밀월관계에 점잖은 미술관까지 한 몫 끼여들게 된 것도 피카소에서 비롯된다. 1939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피카소 회고전’은 ‘문화’와 ‘상품’이 붙어 단일 개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미술관은 권위가 서고 화랑은 공짜로 선전을 하고, 화가는 그림값을 올릴 수 있으니, 누구 말마따나 ‘그들이 함께였을 때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폭발적인 경기호황으로 뭉칫돈이 넘쳐나던 1920년대 미국에서 이들 작전세력의 초단타식 떴다방 전략은 한 사람의 예술영웅을 만들어놓은 셈이다. 덕분에 미술품 가격도 다락같이 높아졌지만.

/노성두·서양미술사학자·서울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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