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아줌마 마라톤클럽’

2002.04.01 16:20

울산‘아줌마 마라톤클럽’

그런 그들이 언제부터인가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뛰지도 못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처녀 적에 비해 훌쩍 늘어난 체중 탓에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렸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서서히 몸이 바뀌더니 생각이 변했고, 결국에는 삶이 달라졌다.

지난해 여름 어느날. 울산시 월드컵 축구장 근처 아파트단지에 살던 아줌마 3명이 모였다. 박옥선씨(41), 박영옥씨(40), 김경선씨(36). 아줌마들은 밤마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놓고는 운동장 근처를 뛰기 시작했다. 거창한 목표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스트레스나 풀고 살도 좀 빼보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달렸지만 좀더 제대로 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 마라톤 관련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인터넷에 홈페이지(cafe.daum.net/azoomamalaton)도 개설했다. ‘아줌마 마라톤 클럽’이 창단된 것이다.

아줌마 마라톤 클럽이 서서히 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다른 아줌마들도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내 울산지역에 사는 15명 정도의 열성멤버들이 구성됐다.

사는 지역이 달라 평소에는 각자 집 근처에서 개인적으로 달리기를 하고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이면 함께 만나 달렸다. 문수구장 근처는 물론 산길이나 호숫가 등 장소를 바꿔가며 어디든 달렸다.

헌데 주위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여자들이 모여서 뭐하는 짓이냐”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 살림이나 잘할 것이지” 등등. 남편들의 비웃음이었다. “지금이야 남편들이 모두 열렬한 후원자가 됐지만 처음에는 반대가 꽤나 심했어요”. 클럽 회원인 강숙자씨(42)가 말했다.

모두가 이전에 마라톤을 해본 경험이 없는 데다 몇년째 집안일만 해오던 아줌마들에게 운동이 만만치는 않았다. 부상도 잦았다. 이들은 지역 마라톤 동호회 연합의 손철수씨(46)를 코치로 영입해 지도를 받기로 했다. ‘온몸에 힘을 빼고 턱을 당긴다’ ‘발바닥부터 지면에 닿아야 한다’…. 기본적 자세와 몸에 맞는 주법, 호흡법, 부상대처법 등을 체계적으로 익혀 나갔다.

실력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달리는 거리가 부쩍 늘어나더니 기록도 단축됐다. 이제는 회원들 모두가 최소한 하프코스 한두번 정도는 완주한 경험이 있을 정도로 기량이 향상됐다. “10㎞ 정도는 뛰어야 겨우 몸이 풀려요”(박옥선씨). 가장 실력이 뛰어난 김경선씨는 풀코스를 3시간 후반대에 주파한다. 아마추어 선수로서는 국내에서 수십등 안에 드는 수준이라고.

박현숙씨(31)는 얼마전 마라톤으로 남편의 콧대를 꺾어놓은 적이 있다. 학창시절 단거리 육상선수였던 남편이 옛 실력만 믿고 박씨와 함께 마라톤 대회에 출전했다가 부인에게 뒤처져버린 것. “저를 얕보고 연습도 없이 같이 뛰었다가 혼쭐이 났죠”. 박씨가 웃으며 말했다.

“처음에는 걸어서도 2㎞를 못갔어요”. 지난해 11월부터 마라톤을 시작한 이은숙씨(36)는 마라톤용 운동화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모르던 철저한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프코스를 2시간 초반대에 달린다. “마라톤 시작한지 얼마 뒤에 제가 10㎞를 뛰었다고 말하니까 남편이 도저히 믿으려 하질 않는 거예요. ‘당신이 10㎞ 뛰었다면 나는 부산까지 달려서 갔다 오겠다’고 말하더군요”.

김인숙씨(34)는 집안에서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하기 직전 마라톤을 시작했다. “아이가 몸이 안좋아 몇년째 병원을 다녀요. 아르바이트로 애 치료비를 대고 살림까지 하며 쉴틈없이 힘들게 사는 데도 남편은 나를 너무 몰라주더라구요. 매일 짜증만 나고 피로가 쌓여갔죠”. ‘여자는 집에 있어야 한다’는 보수적인 남편 몰래 달리기를 시작했다. 달리는 시간만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결혼 후 처음 갖는 시간이었다. 사고가 긍정적으로 변하고 여유가 생겼다. 남편도 달라진 아내의 모습에 생각을 바꿨다. 김씨는 “이제는 남편이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고 전했다.

울산‘아줌마 마라톤클럽’

“모든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버려요.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잡념도 없어지고, 건강해지고, 살도 빠지고…. 주부들에게 이만큼 좋은 운동이 없는 것 같아요”. 박현숙씨는 마라톤의 좋은 점을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벅찬 모양이다.

고독한 운동인 마라톤이지만 이들에게는 함께 즐기는 운동이기도 하다. 한데 모여 신나게 달리고, 뒤풀이 장소에서 생맥주 잔도 기울이며 수다를 떨다보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겨난다. “마라톤이 워낙 고통스럽다보니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마음가짐을 배우게 돼요. 함께 뛰다 처지는 사람이라도 나오면 서로가 도와줍니다”(박영옥씨).

“이젠 하루라도 달리지 않으면 잠이 안와요. 차라리 밥은 굶었으면 굶었지 마라톤은 하루도 거르지 못해요”. 그들에게 이제 마라톤은 생활의 한부분이 된 듯했다.

아줌마들은 오늘도 달린다. 아파트단지에서, 집앞 학교 운동장에서, 또 동네 골목에서…. 달리는 시간만은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며느리가 아닌 인간 누구누구로 돌아간다. 하루 중 잠시만이라도 그럴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멋진 일 아닌가. 스트레스도 풀리고 건강에도 좋으니 이 역시 좋은 일이 아닌가.

▲하프코스는 가뿐, 풀코스는 3명만 완주

마라톤 클럽이니 당연히 대회 참가가 이들에게는 큰일이다.

지난해 창단한 이래 근처에서 열리는 웬만한 크고 작은 마라톤대회에는 대부분 참가했다. 지난 2월에 열렸던 광양 마라톤대회에는 8명이 참가해 전원이 하프코스를 거뜬히 완주하기도 했다.

오는 6일 열리는 경주 벚꽃 마라톤대회에도 10명이 참가해 하프코스를 달릴 예정이다. 이번에는 회원들은 물론 가족들이 응원단을 만들어 플래카드와 꽹과리, 장구 등으로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울 생각이다.

아줌마들에게 가장 큰 꿈은 뭐니뭐니 해도 풀코스 완주. 모임에서는 아직까지 3명 정도만 성공했지만 모두들 풀코스를 완주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 올 가을쯤에는 이중 몇명이 풀코스에 도전할 계획이다.

“풀코스를 못뛰면 마라톤의 맛을 보지 못한 거예요. 마라토너들에게는 일종의 면허증 비슷한 거죠” “마라톤 한다고 하면 몇등 했느냐, 기록은 얼마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선수가 아닌 다음에야 등수나 기록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요. 완주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지니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같은 생각일 겁니다”. ‘주부 마라토너들’에게 풀코스 완주는 건강한 욕망이자 실현가능한 꿈인 듯했다.

/이호승기자 jbravo@kyunghyang.com/

추천기사

기사 읽으면 전시회 초대권을 드려요!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