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놓아 담아낸‘고려인, 아리랑’

2002.10.01 16:32

“옛날에는 러시아 달력에 연필로 음력 명절을 표시해 사용했지요. 이제 고국에서 보내온 달력으로 명절을 정확히 알게 됐으니 조상께 명분을 세울 수 있겠어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연분홍 한복을 날아갈 듯 차려입은 할머니들.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를 되풀이한다. 한 할머니의 선창. ‘아리랑~ 아리랑~ 아라아리이오~, 아리라앙~ 고오개애로오~ 넘어간다~’. 구슬픈 노랫소리는 점점 높아지고 손을 맞잡은 할머니들의 ‘아리랑’은 기어이 울음바다로 변하고 만다.

목놓아 담아낸‘고려인, 아리랑’

키르기스스탄의 고려인 할머니들. 윤씨는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눈으로 똑똑히 봐왔다. 때문에 이들의 아리랑 노랫자락에 애를 끊는 서러움이 묻어나오는 이유를 잘 안다.

처음 윤씨가 고려인의 삶을 보게 된 때는 40대 초. 평범한 영상물 제작자로 일하던 때였다. 어떤 기업으로부터 옛 소련 카자흐스탄에 가 공장 준공식을 찍은 뒤 영상 홍보물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시베리아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원, 지평선을 차고 오르는 일출, 밤하늘을 수놓는 별무리…. 그러나 정작 그가 감탄해 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순박하고 때묻지 않은 그곳 사람들이었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 중에는 그의 차를 운전해주던 ‘세리게이’도 포함돼 있었다. 어느날 세르게이는 윤씨에게 어설픈 한국어로 부탁했다. 자신이 반(半)고려인이며 한국사람인 아버지가 윤씨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 한다고. 낡고 허름한 집. 방 한쪽 구석에서 밭은 기침을 하며 누워있던 세리게이의 아버지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는 다짜고짜 윤씨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제때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오. 어찌해서 이곳에서 자리잡고 평생을 살았지만 한시도 내 고향 경상도 함양을 잊은 적이 없었소. 이 몸으로는 고향에 갈 수 없을 터인데, 제발 유해만이라도 거둬주시오. 부탁이오. 제발…”

목놓아 담아낸‘고려인, 아리랑’

때마침 한·소 수교가 이루어졌다. 윤씨는 조금만 노력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시베리아로, 이곳의 동포 고려인에게로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동안 우리에게 시베리아는 그저 삭풍이 몰아닥치는 눈덮인 동토(凍土)일 뿐이었고, 연해주에 살던 17만여명이 스탈린의 명령 하나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할 수밖에 없었던 서글픈 사연은 그저 ‘그들만의 이야기’였다. 그가 계획한 첫 작업은 카메라로 고려인의 모습을 담아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한국에 배포하는 일. 200㎏은 족히 넘는 ENG 카메라 장비를 이끌고 그는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제2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청정지역 키르기스스탄. 한번 가면 길게는 서너달씩 고려인들 속에서 생활했고 수십차례 그곳을 오갔다. 고려인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고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그 덕에 그의 작품은 곧바로 방송을 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고려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윤씨는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많은 이곳 사정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기아에 허덕일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다. 이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때처럼 언제라도 또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였다. 그런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바로 ‘민족의 정체성’이요, 그들의 조국이 아직도 그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애정어린 관심이었다. 허나 고려인 정착촌에는 ‘한국’을 떠올릴 수 있는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어른들의 입을 통해 한국문화가 겨우 전수되고 있을 뿐이었다.

달력. 1년 365일 매일 바라볼 수 있으니 그것만큼 좋은 선물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자비 7백만원을 털어 한국의 고궁이며, 한국 산하의 사진이 담긴 달력 3,000부를 마련했다. 윤씨의 손을 부여잡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 그들 앞에 윤씨는 오히려 조국의 무관심을 눈물로 사죄했다. 다행히 윤씨가 시작한 ‘고려인에게 달력보내기 운동’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5년이 지난 지금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달력은 처음의 5배인 1만5천개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뜻하지 않은 경사도 있었다. 우연히 방송을 통해 키르기스스탄 고려인들의 모습을 본 동대문시장의 한 한복집 아주머니가 고려인들에게 한복을 나눠주자는 제의를 한 것이다. 올 1월 윤사장은 달력과 덤으로 한복 900벌을 배에 싣고 의기양양 키르기스스탄으로 향했다. 그곳 어른들은 “이게 정말 말로만 듣던 그 한복이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수십년 세월을 그토록 차갑게 냉대해왔어도 그들은 조국의 옷에, 사진에 오열했다. 한번도 발을 디뎌보지 않고서도 고국을 향한 일편단심 ‘사모곡(思慕曲) 아리랑’을 부르는 사람들.

지난 추석명절 때도 할머니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아리랑을 함께 불렀을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윤씨의 눈가에는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그들의 아픈 상처를 무엇으로 어루만져야 할까. 그리고 마음속 깊이 외쳐본다. ‘뿌리’를 찾아헤매는 그들을 위해 우리 모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목놓아 담아낸‘고려인, 아리랑’

1800년대 후반 우리나라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연해주로 이주를 시작하면서 ‘고려인’의 역사도 시작됐다. 땅이 넓고 기름지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대거 연해주로 이동해가면서 많은 고려인들이 정착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민족이주정책에 의해 소수민족들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고려인들의 정착지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현재 중앙아시아에 머물고 있는 고려인의 숫자는 45만명에서 5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92년 소련에서 각 연방국가들이 독립하면서 연방국들은 혹독한 자국민 보호정책으로 일관했고, 그 때문에 소수민족들은 많은 괴로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자체적으로 마을을 형성해 학교를 세우고 한글을 배우는 등 민족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계속 기울이고 있다.

/김정선기자 kjs0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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