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미발표 희곡 무대에

2003.09.01 16:46

연극 ‘야곱과 그의 주인’

연극 ‘야곱과 그의 주인’(14일까지 대학로 바탕골 소극장)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등으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국내 미발표 희곡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밀란 쿤데라의 미발표 희곡 무대에

극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야곱과 주인이, 역시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문을 연다. 이들은 하인과 주인이라기보다 오랜 친구 같은 느낌으로 잡담을 주고 받는데, 관객이 어수선함을 떨구고 극에 몰두할 때쯤 각자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이때부터 무대는 세 공간으로 나뉜다. 하나는 야곱의 과거를 보여주는 공간, 다른 하나는 야곱과 주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현실 공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주인의 과거 공간이다.

무대 장치를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만으로 관객의 머릿속에 두 개의 과거와 하나의 현실 공간을 공존시켜 놓는 기법이 재미있다. 각 공간들은 철저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소통되는데, 예컨대 과거로 돌아가 연기하는 야곱을 현실의 주인이 불러내 이야기를 중단시키고 과거 속의 인물과 현실의 인물이 이야기도 주고 받는다.

내용상으로 보면 이 작품은 치정극이다. 엉덩이가 큰 여자를 좋아하는 주인은 친구 생 우엥 기사에게서 이상형 여인 아가타를 소개받아 당장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알고 보니 생 우엥과 아가타는 서로 연인 사이. 주인은 ‘친구’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이들에게 철저히 이용당한다.

반면 유들유들한 성격의 야곱은 절친한 친구 오트라파를 속이고 그의 애인 유스티나를 취한다. 극이 흘러감에 따라 주인과 야곱은 피해자냐, 가해자냐만 다를 뿐 자신들의 이야기가 어딘지 모르게 서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극 중간중간에 “저 위에(하늘, 신) 그렇게 써있어. 모든 일은 저 위에 쓰인 대로야”라든가 “난 우리가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 궁금해. (작가가) 우리에 대해 잘 써주었을까?”라는 대사로 극중 인물에 현실적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작품의 주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연극무대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발상이 돋보이는 작품. 대문호의 희곡답다. (02)3273-6885

〈이상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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