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읽는세상

‘책임있는 교만’ 이 낫다

2004.06.01 19:15

한국인과 한국사회를 대표적으로 특징짓는 생활양식으로서의 문화 가운데 ‘겸손’을 유난히 중요시하는 가치관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것이 실질을 담은 내용적 겸손이 아니라 외양만 갖춘 형식적 겸손일 때,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가치가 된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당선되면 진짜 머슴처럼 국민을 섬기겠다고 비굴할 정도로 허리를 굽혀 겸손해하지만 당선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목을 곧추 세우는 경우를 우리는 허다하게 목격해왔다. 그들은 교만할 수 있기 위해서 겸손한 척 했을 뿐이다. 국민들도 그들의 돌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간다. 어디 정치인뿐이랴. 이는 한국의 모든 리더십에 나타나는 공통현상이다. 이미지의 마술에 홀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이 영상시대에 그런 현상은 더욱 기승을 부린다.

- ‘무책임한 겸손’ 되레 폐해 -

그렇지만 자기자랑, 교만을 무조건 매도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는 오히려 겸손과 교만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나 사회공익적 차원에서 자기자랑이 겸손보다 반드시 더 문제적인가? 나는 지금까지 참답게 겸손한 사람도 많이 봤지만 자기자랑을 대신한 거짓된 자기비하도 신물이 나도록 목격해왔다. 자기를 낮추거나 부정하는 정도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을 읽는 것이 우리의 문화적 관습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역설적으로 자기를 비하하는 미덕(?)을 쌓은 것이다. ‘개혁’이 화두가 되고 있는 지금, 우리가 그동안 미덕으로 숭배해왔던 겸손이 책임회피의 장치로서 악용되고 있지는 않은지 살필 일이다.

‘나’를 자랑하자. 스스로 겸손해했던 부분에 대해서는 사후에 책임질 일이 없겠지만 스스로 자랑했던 사항에 대해서는 면피할 길이 없기 때문에 ‘나를 자랑하는 것’은 곧 우리 사회를 책임사회로 만드는 한 방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책임’을 용서받기 위해 ‘겸손’했던 사람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무책임하게 겸손한 것보다 책임 있게 자랑하는 교만이 이 시대가 요청하는 애국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아닐까?

한 예로 여기에 나를 자랑해본다. 나는 환경주의자다. 지구적으로 환경재난이 이미 체감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환경은 가장 절박한 문제다. 경제야 우리가 조금 못 살 각오를 하면 참을 수 있지만, 환경은 우리에게 참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한 소시민이 지구의 환경개선을 위해서 할 수 있는 큰 일은 없다. 그런 것은 정치적으로 국제적으로 정책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지구촌 시민 각자가 환경보존을 위해 작은 일들을 성의껏 실천한다면 그 작은 실천들이 모여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나는 믿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환경주의를 실천한다. 공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자율요일제뿐만 아니라 10부제를 모두 실천하면서 승용차 사용을 최대한 줄인다. 지하철은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지만 타는 동안의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으니 오히려 시간관리가 더 효율적이다. 수질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는 재생빨랫비누로 머리를 감는다. 이제 어쩌다 호텔 같은 데서 샴푸를 쓰면 두피에 상처가 날 만큼 내 머리는 재생빨랫비누와 친해졌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를 최대한 줄이고 모든 국물은 체내로 처리한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재활용 쓰레기의 분류를 철저히 한다. 무엇보다 식물을 몹시 사랑한다. 좁은 아파트 베란다를 꽉 채운 화분의 관리는 우리 집에선 순전히 내 몫이다.

- 애국의 새 패러다임 필요 -

직업윤리에 관해서도 몇가지 원칙이 있다. 연극평론가이자 교수로서 나는 연극과 교육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의 애정은 공정하다. 열심과 성의를 다해 준비하고 가르치고 비평한다. 친소와 관계없이 공정하고 정직하게 연극과 학생의 업적을 읽는다. 새로운 실험과 학생들의 도발적 요구에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응하려고 노력한다. 나는 다른 ‘나’들의 자랑을 듣고 싶다. 책임 있는 자랑들을 모아 작은 데서부터 사람이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다. 감히 나는 교만의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켜 책임사회를 지향하자는 운동을 제안하고 싶은 것이다.

〈김윤철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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