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만난 10인

스마일 은미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2005.05.01 16:29

‘가족’에게 용서란 말이 필요 있을까. 그러나 누군가 묻는다면 ‘모든 걸 용서했다’고 말하리라. 1998년 만난 한 여고생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고백했다. 아버지는 무기수로 6년째 수감생활 중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한달 앞둔 어느날. 모두의 운명을 바꿔놓은 몹쓸 사건이 일어났다. 집 밖으로만 나돌던 엄마 때문에 싸움이 났다. 아버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일을 저질렀다. 말리던 어린 딸마저 떼밀었다. 그때 심하게 방벽에 머리를 부딪친 아이는 뇌를 크게 다쳐 2년간 식물인간으로 죽음에 맞섰다.

[다시만난 10인]스마일 은미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깨어나니 엄마는 하늘나라로, 아버지는 교도소로 가고 없었다. 오른쪽 팔다리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말도 어눌했고 단짝 친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느 보육원에서 새 인생을 시작했다.

남들 열번이면 외는 영어단어를 천번은 더 외고 외워야 하는 소녀. 2년 늦게 입학한 중학교를 마치고 외국어고 1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한달 생활보조금 9만원. 5만원은 적금 부었다. 아빠 나오시면 함께 살 준비. 아빠께 부칠 돈은 용돈에서 또 뗐다. 1년에 두번 면회 가는 길에 쓸 영치금은 돼지 저금통에 또 따로 모았다. 불편한 몸으로 악착같이 공부하며 꿈을 키웠다.

“언젠가는 아빠와 함께 행복하게 살 거예요?” 누가 상처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잘 웃는 바람에 별명도 ‘스마일’인 여고생. 그해 12월28일자 ‘매거진 X’ 주인공 ‘스마일 은미’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7년 만의 재회

“선생님, 선생님! 우진이 똥 쌌어요.” 희수(5)를 옆에 앉혀놓고 한창 숫자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킁킁 대며 우진이 엉덩이에 코를 갖다댄다. “우혁이 너 장난치면 혼나.” 혼낼 듯한 선생님 팔 동작에 아이가 도망치며 까르르 웃는다. 오후 늦은 햇살이 방안 가득하다.

인천 계양구 작전동의 ‘은하 어린이집’에서 장은미 보조교사(24)를 만났다. 7년 만이다. 한겨울 외투없이 허전한 교복을 입고도 카메라 앞에서 환히 웃고 난생 처음 맛보는 피자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던 여고생이 시집갈 처녀가 됐다.

사는 곳은 같다. 인천 ‘사랑밭회 해피홈’. 갈 곳 없는 아이들이 의지하며 사는 곳. 중학교 1년 때부터 살았다. 어른이 됐지만 자립하기엔 세상이 아직 벅차다. 영일외고 중국어과에 다닐 때는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활동’ 하는 게 꿈이었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천천히 한발자국씩 다가가고 있으니깐.

“대학에서 ‘어린이 선교학’을 전공했어요. 중국에도 한번 다녀온걸요…. 소중한 추억이에요.”

매거진 X를 통해 은미를 알게 된 한 독자가 고교 1학년 겨울방학 때 3박4일 중국여행을 마련해줬다. 당시 해피홈에서 돌봐주던 교사와 함께 만리장성도 둘러보고 톈안먼 광장도 밟아보고 자금성, 이화원도 관광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세상 쓴맛을 좀 본 눈치다. 용기를 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 했다. 홀에서 청소를 맡았다. 아무래도 동작이 굼떴는지 매니저가 잔뜩 싫은 표정을 짓고 거칠게 말하더니만 “내일은 나오지마!” 하더란다.

“하루 일당 2만원 받고 끝났어요. 아침부터 정말 열심히 했는데, 답답하기도 했을 거예요.”

어릴 적 뇌를 다친 후유증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한 게 탈이었다. 그 다음엔 지하철로 1시간 거리인 서울 신촌의 어느 회사에 사무보조로 취직했다. 왼손으로 컴퓨터 타자를 연습하고 또 연습한 후였다. 그러나 두달을 채우지 못했다. 경리 언니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순탄치 않았다.

돈을 벌어보려고 애쓰던 때였다. 아는 목사님의 도움으로 지금의 어린이집에서 낮에 일하고 야간 ‘어린이 선교 신학교’에 다녔다. 작년 졸업 후엔 어린이집 종일반을 맡고 있다.

[다시만난 10인]스마일 은미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불편한 몸으로 버스 승차를 거부당한 날은 1시간씩 걸어 등교했다. 그러나 결석 한번 하지 않았다. 깨알 같은 글씨로 영어단어를 셀 수 없이 반복해 외워도 다음날이면 가물가물했지만 또 외웠다. 어린이 교사가 돼서는 학교 때 공부하듯 했다. 한쪽 팔로 아이들 기저귀를 갈아주고 간식을 먹이고 걸레 빠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처음엔 몸이 성치 않은 선생님이라고 엄마들 불만이 많으셨죠. 지금은 불평하는 분 없어요.”

한달 월급 30만원. 여고생 때 그랬듯 한푼 두푼 저축한다. 아버지 면회는 1년에 두번 마산교도소로 간다. 지난 겨울 면회 때는 핑계를 대느라 혼났다. 사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안그래도 성치 않은 오른쪽 다리의 뼈가 부서져 철심을 박았다. 한달간 입원하는 바람에 제때 면회를 가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서 불구가 된 딸을 볼 때마다 가슴에 못이 박힌 아버지에게 차마 사고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평생 박아넣을 철심도 비밀이다. 무기수이지만 모범수가 된 아버지는 “미장 기술을 익혔다”며 자랑하셨다. 편지도 여전히 자주 주고 받는다. 언제나 “미안하다, 미안하다…”로 끝나는 편지.

13년간 받은 편지는 보물 1호다. 두번째 보물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 7년 전부터 인연을 맺어온 한 독자가 선물한 것이다. 통화료도 몇년째 내준다. 고맙고 미안한 마음에 항상 짧게 통화한다. 주위의 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가장 큰 힘이었다. 아버지도 오래 전 용서했다.

다가오는 어버이날. 오늘은 카네이션 붉은 빛 닮은 종이 위에 편지를 쓰련다. 슬픔 한방울, 사랑 한방울, 그리움 한방울, 희망 한방울…. 참으려 해도 자꾸 떨어지는 눈물. 어쩌나, 아버지가 걱정하실텐데. ‘스마일 은미’는 새 종이를 꺼낸다.

“사랑하는 아버지.

벚꽃이 지고 진달래가 한창입니다. 봄 바람에 아버지 향기를 맡아 보았으면 합니다. 눈을 감으면 어린 시절 놀이동산으로 놀러갔던 시절이 그리워요. 부모님이랑 함께 했던 추억들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 함께 했으니까요….

5월입니다. 어버이날 누구한테 카네이션을 달아 드리지요? 서글픕니다. 그러나 괜찮아요. 지금까지 부모님 대신 돌봐주신 목사님, 원장님께 달아드릴게요. 어머니는 하늘에서 절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저를 낳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세상에 태어났으니까요.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해피홈 보육원에서 나가야 하는데 계속 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지금 저의 머리 속은 행복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건 아버지랑 같이 살 생각, 생각만해도 행복해지는 이 설렘.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카네이션을 달아드릴게요. 아버지 가슴에 얼굴도 파묻어볼래요. 벌써 아버지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집니다. 그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버지도 꼭 건강하셔야 해요.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하는 딸 은미 올림.”

〈인천|글 김희연기자 egghee@kyunghyang.com〉

〈사진 박재찬기자 jcphoto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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