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꿈꾸기 위해 읽는다

2005.11.01 18:03

학교 도서실을 리모델링 했다. 4층 서쪽 구석진 모퉁이에 잊혀진 듯 있었던 것이 1층으로 내려와 교실 두 칸 정도를 차지하면서 확장되었다. 두 달 간의 공사를 끝내고 개관한 첫날, 도서실은 몰려드는 학생들로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도서부원들은 “박 터졌다!”며 즐거운 비명이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누군가는 나지막이 깔리는 음악을 음미하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아도 흐뭇한 광경이다.

도서실 단골인 명택이는 정말 책을 좋아하는 아이다.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노는 일 없이 항상 조용히, 혼자서 책에 묻혀있는 명택이를 친구들은 ‘존재감이 없다’는 말로 그 투명성을 표현하곤 했다.

국어교과서에 ‘우투리 이야기’라는 전설이 실려 있는데 이른바 ‘날개 달린 아기장수’ 이야기다. 그런데 어느날 명택이는 그 ‘우투리’라는 이름의 유래를 내게 설명했다. 태어날 때 아랫도리가 없이 윗부분만 있다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교과서에는 없는 이야기라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도서실에 있는 책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교과서에는 또 ‘현명한 아내 만카’라는 체코 민담이 실려 있는데 명택이는 어느날 내게 ‘러시아 민담’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역시 도서실에 있는 책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확인해 보니 정말 그러했다. 등장인물만 차이가 있을 뿐이지 수수께끼 내용이 똑같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투리’라는 이름의 내력, 그리고 체코 민담이 체코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로 전파되고 있었다는 것 등 나는 명택이 덕분에 훌륭한 교재연구를 한 셈이 되었다.

칭찬이 거듭되자 명택이는 신이 났다. 아이들은 이제 명택이한테 ‘존재감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적어도 국어시간에 명택이는 교과서보다, 선생님보다 더 박식한 아이인 것이다. 명택이는 도서실에서 존재 의의를 찾았고 명랑한 얼굴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누군가 무엇에 관한 궁금증이 생기면 곧 명택이한테 물어보는 것이다.

“민들레 같은 들꽃은 흙이랄 수도 없는 먼지더미에서도 싹튼다고 교과서에 나왔지? 그런데 책을 봤더니 먼지에는 정말 흙보다 영양분이 더 많대.”

“아, 그렇구나!”

미셸 푸코의 글에 ‘도서관 환상’이라는 게 있다. 플로베르의 ‘성 안트완의 유혹’이 도서관의 수많은 책들의 도움을 받아 태어난 작품이라는 설명에 덧붙여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몽상적인 것은 이제는 인쇄된 기호들의 희고 검은 표면에서, …먼지 앉은 닫혀진 책에서 태어난다. 그것은 조용한 도서관에서, 그리고 그 도서관을 사방으로 둘러막으면서 또 다른 한쪽의 불가능의 세계에로 입 벌리고 있는 줄지어선 책들과 그 제목들, 그리고 선반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펼쳐지는 것이다. …상상적인 것은 책과 램프 사이에 놓인다. …꿈꾸기 위해서는 눈을 감을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

명택이가 앞으로도 도서실의 많은 책들 사이에서 꿈꾸며 끝내 한 놀라운 ‘환상’을 경험하기를 기대해본다.

〈이석범/서울신원중 교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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