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자가 보는 세상

(20) 지하철속 문화적 질서와 규칙

2006.12.08 15:54

-‘익명의 개인’ 공존하는 ‘공공의 공간’-

지하철 막차 풍경. 한 승객이 좌석의 반을 차지한 채 누워있다.

지하철 막차 풍경. 한 승객이 좌석의 반을 차지한 채 누워있다.

현대 도시인의 하루 일과를 보면 한 곳에 머물러 있는 시간 못지 않게 이동하는 시간이 제법 큰 몫을 차지한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시간은 이제 ‘자투리 시간’이나 ‘버리는 시간’으로 넘겨버리기에는 너무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대도시의 지하철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시간적인 규칙성과 안정성, 이동 구간이 정확하게 매겨져 있다는 점, 그리고 누구나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중적 교통수단이라는 점에서 도시민들의 일상 공간문화 안에 깊숙이 자리매김되기 시작했다. 한국에 지하철이 등장한 지도 30년이 넘으면서 지하철 공간 영역 안에서 사람들이 행하는 방식에도 일종의 패턴이 생겼다. 그리고 그 패턴은 문화변동과 함께 스스로 진화해 간다.

이런 지하철의 공간문화에는 각종 역설들이 큰 무리 없이 공존하는 것을 눈여겨볼 수 있다. 우선 이동성과 안정성, 그리고 불규칙적 익명성의 공존이다.

지하철이 만들어내는 노선의 규칙성과 이동시간 안정성은 역설적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이 가장 적게 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용자들의 ‘익명성’을 높인다. 예를 들면 정해진 구간을 정해진 시간에 이동하는 공간이기에 누구든지 어느 곳에서든 올라 탈 수 있고 역시 어느 곳에서든 내릴 수 있다. 설령 잘못해서 내릴 곳을 지나쳤다고 해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다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또 행선지가 각각 다른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만났다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이 이렇게 일정 구간 위를 움직이는 열차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또 다른 역설의 공존 패턴은 가장 대중적이고 익명적이며 공공적인 공간에서 가장 사적이고 개인적인 행위 중 일부가 추구되고 실행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하철 열차 안에 올라선 사람들이 차지하기를 원하는 공간이 어떤 순서와 위계로 매겨지는지를 보면 금세 드러난다. 물론 출·퇴근 시간의 만원 지하철에서는 공간 차지의 선택가능성도 없고 따라서 경쟁이나 위계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한산해서 앉을 자리가 충분히 남아있는 경우에는 사람들이 맨 먼저 채워 앉는 의자가 따로 있다. 그것은 출입문 바로 옆에 있고 금속 파이프로 팔걸이가 쳐져 있는 코너의 자리다. 그 자리가 채워지면 사람들은 바로 그 옆 자리에 다가가 앉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과 한 자리 정도를 떼고서 앉는다. 점점 사람이 많아져서 앉을 자리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지면 아무데나 빈 자리에 앉는다. 모르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가야 하는 지하철에서 이 순서는 다른 사람과의 신체적 접촉과 시선의 접촉이 가장 적은 곳부터 채워지는 원리를 따른다. 동시에 일시적이나마 가장 편안한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순서는 서서 가는 자리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입석 중 가장 선호되는 곳 역시 출입문 바로 옆 자리다. 금속 파이프 팔걸이가 쳐져 있는 의자의 바로 반대편 자리가 되겠다. 그곳에서는 따로 손잡이를 잡지 않고도 서서 갈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허리나 등, 엉덩이를 이용해 파이프 난간에 기대고 서서 신문을 보거나 다른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출입문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내릴 곳에서 곧바로 내릴 수 있다.

의자 중 가장 선호되는 곳에서 사람들이 안심하고 가장 많이 하는 행동 중 하나는 취침이다. 그런데 이 취침이라는 행위를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잠자는 행위는 사람이 행하는 일상적 행위 중에서도 가장 정적이며 동시에 가장 사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 중 하나다. 누군가 처음 보는 사람이 서로를 소개한 뒤 웃으며, “당신이 잠자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보았습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는가? 심지어 그가 “사실, 당신이 잠깐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드셨었지요”라고 말한다면야. 그것은 우리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별’에서도 가장 낭만적이고 가슴 떨리는 장면의 하나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는 남녀노소 따지지도 않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 틈에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그대로 잠들어 버린다. 그것도 타인들과 어깨를 완전히 밀착한 채로 앉아서 말이다.

지하철이 지하 공간을 움직인다는 점, 그래서 열차 안에는 항상 불을 켜놓고 창밖은 캄캄하다는 점은 밤의 공간을 만들어 놓는 것과 같은 효과다. 거기다가 함께 앉은 사람들을 포함해 주위에 가득 찬 사람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고 상호작용을 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은 지하철의 이 의자에 앉은 나에게 있어 철저히 익명인 것을 넘어서서 일종의 ‘벽’과 같은 존재들이 되어버린다. 혹은 커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어쩌다 그들과 시선이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다. 정말이지 사람들은 마주서거나 마주앉아있으면서도 잘도 서로의 시선을 피한다.

또는 시선을 마주치는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각종 장치들을 활용한다. 대표적인 것은 지하철 열차에서 주로 읽히는 용도로 탄생하거나 성공적으로 판매되는 가판 신문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휴대전화나 PMP 기기로 할 수 있는 게임 등이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부근의 광고판을 갑자기 읽어보기 시작한다. 그것도 다 하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눈을 감는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 잠들기 쉽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공공 교통수단의 디자인이라는 장치도 한 몫을 한다.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에서는 잠자기가 더 어렵다. 의자들 대부분이 무릎을 맞대고 근거리에서 마주보는 형태로 되어있어서, 막상 눈을 감고 잠자는 만용을 부리기가 더 어렵다. 몸만큼이나 시선 처리가 중요하다. 맞은 편에 앉은 사람들이 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야 잠을 잘 수 있다. 옆 자리는 밀착되어도 상관 없다. 디자인된 물리적 공간의 하드웨어와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만나, 이동의 공간에서 새로운 문화적 질서와 규칙을 만들어간다.

〈송도영|서울시립대교수·도시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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