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여성’ 들의 위대한 싸움

‘우리의 소박한 꿈을…’에 담긴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들의 목소리

꼭 1년 전이다. 대형할인점의 계산대에 하루종일 선 채 군소리 없이 기계처럼 일만 하던 여성들이 어느 날 갑자기 매장을 점거하고 연좌농성을 벌이는 일이 발생했다. 그들은 그때까지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고, 자신이 ‘비정규직’인지조차 알지 못했던 주부였다. 또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하기를 꿈꾸며 한 푼 한 푼 모으던 젊은 여성들이었다. 20일 만에 경찰의 강제해산에 의해 매장 밖으로 쫓겨났지만 이제 그들의 삶은 달라져 있다. 어느새 ‘팔뚝질’이 제법 익숙해졌으며,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눈물짓지 않는다. 2007년 여름을 달군 파란 반팔의 ‘스머프 티셔츠’를 입은 그들. 1년이 지난 지금도 싸우고 있다.

지난 23일 서울 뉴코아 강남점에서 이랜드 노조 회원들이 뉴코아 이랜드 노조 전면파업 1주년 결의대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한 노조원이 피켓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다. | 남호진기자

지난 23일 서울 뉴코아 강남점에서 이랜드 노조 회원들이 뉴코아 이랜드 노조 전면파업 1주년 결의대회를 열고 있는 가운데 한 노조원이 피켓을 든 채 생각에 잠겨 있다. | 남호진기자

이랜드 비정규직 노조원들이 홈에버 상암월드컵경기장점을 점거한 지 1주년을 맞아 최근 출간된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후마니타스)는 지난 1년간 이어온 ‘착한’ 여성들의 ‘소박하지만 위대한’ 싸움을 담았다. ‘삶이보이는창 르포문학모임’과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가 함께 기획한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까르푸에서 홈에버로 바뀌고 나서도 장사가 너무 잘돼서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하고 자만하고 있었어요. 이 상암점이 아시아에서 매출 1위였거든요. 굉장히 바빴어요. 지금도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바쁜데 설마 우리를 어떡하겠어! 자르기야 하겠어? 그러고 안심하고 있었어요. 우리가 제일 억울했던 것은 이렇게 잘릴 줄도 모르고 그동안 바보같이 너무 열심히 일했다는 거예요.(울음) 근데 말 시작부터 눈물이 나오냐.”

당시 매장점거 주역 중 한 사람이었던 조희숙씨(40)의 말이다. “왜 그렇게 바보 같았을까”라는 말은 이 여성들에게서 공통으로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지난 25일 서울의 홈플러스 영등포점 앞 비정규직 집회장에서 기자가 만난 이랜드 조합원들도 인터뷰 내내 그 말을 되뇌었다.

“이제 다시 일터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 익명을 요구한 51세 주부 이모씨의 말이다. “그때는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일해서 회사가 잘 되면 나도 잘 될 줄 알았는데, 이제는 왜 그렇게 안되는지 알았어요. 우리가 말을 안하고 묵묵히 일만 하니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바보로 알았던 거예요. 모여서 이렇게 소리를 내야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지난 1년간 얻은 저의 성과입니다.”

농산품부에서 무거운 야채 박스를 나르는 일을 하느라 허리가 좋지 않다는 이씨는 “오십 평생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하며 선량하게 살아왔는데, 지난 1년 동안 경찰서도 가보고, 비정규직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참 많은 변화를 겪었다”며 “내 한 몸 아프다고 해서 집회에 안나오면 여기 동생들이 힘 빠질 것 같아서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옆에 서있던 최승진씨(39)는 “나쁜 짓 하지 않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매장점거 후 체포돼 즉결심판에 가서 ‘선처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할 때에는 눈물이 나더라”며 “경찰이 ‘민중의 지팡이’라는데 왜 우리에겐 지팡이가 아니고 몽둥이가 되는지 모르겠다. 세금 꼬박꼬박 내고 열심히 일한 노동자로 살아왔는데, 내 세금으로 충당했을 것이 뻔한 물대포까지 맞고보니 도대체 국가란 게 무엇인지 의문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날 집회 참가는 또 다른 할인점인 홈플러스의 노조원들을 위한 연대의 일환이다. 이랜드 노조원들은 요즘도 매일 다른 집회 1~2건에 참석해 연대하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으로 홈에버 월드컵몰을 택했던 오주영씨(26)는 “세상이 정의롭게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게 가장 큰 소득”이라고 했다. “파업 시작 전에 이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할 뻔했던 기회도 몇 번 있었는데, 그때 직장을 옮겼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세상이 이렇다는 것을 어차피 알게 될 거였다면 하루라도 일찍 알게 된 것이 나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연대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았고요.”

홈플러스 앞 집회가 끝난 후 이들은 홈에버 상암점을 점거한 지 1년되는 날인 오는 30일에 마련할 문화제를 준비해야 한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난 1년간 함께 했던 동료들이 많이 떠나 이제는 15명 정도만 남았다. 홈에버 일터로 돌아간 이들도 있고, 다른 일을 찾은 이들도 있다. 지금 남아있는 15명도 파출부 등의 일을 하며 가계에 신경을 써야 한다. “엄마, 전기 공급이 끊겼어요” “급식비를 못내 수돗물을 마셨어요”라는 아이의 문자메시지에 가슴이 찢어지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복직이 아니다. 지금까지 싸워왔으니, 존재의 당위성을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바람뿐이다. 회사 측의 성의있는 사과와 정규직화, 그것은 바로 “인간답게 살고 싶다” “내 자식에게는 비정규직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소박한 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소박한 꿈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난 1년의 싸움을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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