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에즈 특구서 움트는 이집트 ‘경제개혁’의 꿈

2010.06.29 17:36 입력 2010.06.30 01:57 수정
카이로·자파라나 | 구정은 기자

2008년 사활 걸고 산업신도시 조성… 잠재력 지녀 투자유치 규모 증가세

‘29년째 집권’ 현 대통령 신뢰 낮아… 성공 여부 내년 대선이 중대 고비

지난달 24일 홍해에 면한 이집트의 수에즈특별경제구역(SEZ)을 방문했다. 카이로에서 1시간 동안 차를 타고 달려, 아인 수크나 항구에 붙어있는 SEZ에 도착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새로 지은 건물과 한자가 쓰인 깃발들이 나타났다. 중국 국영 톈진경제기술개발지역공사(TEDA)가 부지를 빌려 짓고 있는 SEZ 내 ‘중국 구역’이었다.

홍해 연안 자파라나의 드넓은 사막에 풍력발전용 터빈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집트는 2020년까지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 비율을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20%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자파라나 | 구정은기자

홍해 연안 자파라나의 드넓은 사막에 풍력발전용 터빈들이 줄지어 서있다. 이집트는 2020년까지 풍력과 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 비율을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20%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자파라나 | 구정은기자

접착식 부직포 제품들을 생산하는 중국 회사 CTMC의 현지공장에서는 히자브(머리수건)를 두른 이집트인 여성 노동자들이 부지런히 손을 놀려 생산된 제품을 포장하고 있었다. CTMC는 이런 종류의 섬유제품 생산 세계 3위 규모의 기업이다. 이웃한 요업공장은 이집트 기업인 클레오파트라그룹 산하 ‘세라미카 엘도라도’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거대한 사일로에 점토 반죽이 흐르고 희뿌연 공기 속에 욕실용 타일을 실은 컨베이어 벨트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회사의 홍보 동영상에는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모습이 연신 등장했다. 외국계 자본이 투자되지 않은 ‘100% 이집트 기업’ 중 최대 규모인 만큼 무바라크도 큰 관심을 갖고 있고, 수시로 이 회사 공장을 찾는다는 것이 안내원의 귀띔이었다.

■ 무바라크의 경제개혁 실험

2008년부터 짓기 시작한 SEZ는 이집트가 사활을 걸고 있는 경제개발 계획의 핵심 사업 중 하나다. 면적 1㎢의 TEDA 구역은 공장과 종합서비스센터, 주거시설 등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TEDA는 이를 발판삼아 향후 총 7㎢로 확대해 주거시설과 공원, 스포츠시설 등을 갖춘 산업신도시로 만들 계획이다. 브리핑을 하는 중국인 매니저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이집트는 중국 구역 옆에 한국 구역 등도 유치할 예정이다. 이미 오사마 살레 이집트 투자청장이 지난달 한국을 다녀갔고, 곧 다시 방한할 것이라고 했다.

북아프리카의 ‘잠 자는 거인’ 이집트가 깨어나려 몸부림치는 모습은 SEZ를 비롯해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집트는 유엔, 국제원자력기구(IAEA), 아랍연맹의 수장들을 배출하는 등 외교무대에서 큰 목소리를 내왔다. 하지만 경제에서는 관광수입과 국외 원조에 의존, 수십년째 답보를 면치 못했다. 공화국 초대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랍사회주의의 유산인 방만한 국영기업, 낡은 인프라, 부패한 관료제도, 정실주의 등으로 인해 ‘경제적 후진국가’로 처졌다.

그랬던 이집트에 자극을 준 것은 최대의 돈줄이자 독재정권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미국이었다. 무바라크 현 대통령은 1981년 암살된 안와르 사다트의 뒤를 이은 뒤 지금까지 29년째 계엄령을 유지하며 철권을 휘두르고 있다. 내년 대선에서 아들 가말(현 집권 국민민주당 정책위원장)에게 권력을 세습하려 한다는 얘기도 있다. 무바라크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강경진압하면서 억압통치로 버텨왔다. 2003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 조지 W 부시 정권은 사담 후세인 체제를 몰아낸 것을 옹호하기 위해 ‘중동 민주화 구상’이라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제는 미국에도 짐이 되어버린 중동의 친미 독재국가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적 개혁을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무바라크는 미국의 압박에 못 이겨 2005년 첫 다당제 대선을 실시했다. 야당 후보 탄압과 극심한 부정선거를 통해 무바라크는 88.6%의 지지율로 당선됐다. 선거 뒤 무바라크는 국민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가시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핵심은 민영화와 일자리 만들기였다. 민영화로 재정을 충당하고, 해외투자를 유치해 공장을 세우고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가 독점해온 서비스 분야를 일부 개방하고 ‘군수공장’이라는 미명 하에 생필품을 생산하던 국영 사업장들을 국내외 기업들에 매각했다. 하지만 이집트 내 민간자본이 발달해 있지 않아 대부분 국외 기업들에 팔렸다. 2004년 7월 취임한 아흐마드 나지프 총리와 가말의 최측근인 마흐무드 모히엘딘 투자부 장관 등이 경제개혁의 선봉장이 됐다.

■‘나일강의 기적’ 가능할까

최소한 지금까지는 경제개혁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입액은 2002~2003 회계연도 4억3500만달러(약 5200억원)에서 2007~2008년에는 132억4000만달러로 급증했다.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 때문에 4.7%로 잠시 낮아졌지만 2007, 2008년 연속 7%대를 기록했다. 재작년 18.3%에 이르렀던 인플레는 지난해 10.1%로 낮아졌다. 카이로에서 만난 모히엘딘 투자장관은 “무엇보다 중소기업 수가 5년 사이 2배로 늘어 지난해 6만7000개를 기록한 것이 큰 성과”라고 강조했다.

수에즈특별경제구역(SEZ)에 위치한 중국 섬유회사 CTMC 공장에서 지난달 말 이집트인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SEZ | 구정은기자

수에즈특별경제구역(SEZ)에 위치한 중국 섬유회사 CTMC 공장에서 지난달 말 이집트인 여성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다. SEZ | 구정은기자

이집트를 낙관적으로 보는 이들은 ‘나일강의 기적’을 일궈낼 잠재력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첫째는 거대한 내수시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집트는 인구 8047만명으로 중동·북아프리카 최대 시장이다. 두번째는 저렴한 에너지 가격이다. 석유매장량 44억배럴, 하루 생산량 67만5000배럴. 천연가스도 2조1900억㎥를 보유하고 있고 연간 627억㎥를 생산한다. 근래에는 풍력·태양광 등 재생가능 에너지 투자에도 열심이다.

SEZ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홍해 바닷가의 자파라나는 이집트의 미래 동력을 상징하는 곳이다. 8000㎢의 모래땅에 높이 35~54m의 거대한 바람개비 700여개가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현재 발전용량은 430㎽. 자파라나를 중심으로 한 풍력발전은 이집트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8%가량을 맡고 있다. 낙후된 남부 아시우트 등지에서는 태양광 발전을 포함한 ‘상이집트개발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이집트는 2020년까지 전체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재생가능 에너지로 충당하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친환경기술 선진국인 유럽연합과 같은 목표치다. 또다른 성장 요소는 값싼 노동력이다. 수에즈의 CTMC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월 500파운드(약 10만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집트가 내세우는 것은 지리상의 이점이다. 이집트는 유럽, 아프리카, 중동, 남아시아로 뻗어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미국과는 특별산업지역(QIZ)협정에 따라 수출품 관세혜택을 받고 있고, 유럽과도 파트너십협정을 맺었다. 터키와는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했다. 동남아프리카공동시장(COMESA)을 통해 남아프리카로도 진출할 수 있다. 실제 CTMC의 이집트 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들도 전량 유럽으로 수출된다.

그러나 무바라크의 경제개혁이 성공할 것이라고 장담하긴 이르다는 반론도 많다. 이집트 정부의 대외 신뢰도는 그리 높지 않다. 그래서 유일한 특별경제구역인 SEZ의 홍보에도 중국인들을 앞세운다. CTMC는 중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수에즈에 나와 있는 ‘전략적 진출’ 기업이다. 사막에 휘날리는 TEDA의 깃발들은, 이집트 정부의 분홍빛 약속들보다 중국의 존재가 투자유치에 훨씬 보탬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이집트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통계와 현실 사이

[세계의 창]수에즈 특구서 움트는 이집트 ‘경제개혁’의 꿈

임금이 싼 대신 노동생산성은 낮다. 고학력자들은 유럽과 미국으로 빠져나가 두뇌 고갈이 심하다. 민간기업의 성공사례인 클레오파트라그룹의 경우 이집트 최대 기업이라 하지만 고용인원 2만명에 불과하다. 2400만명의 노동인구 중 550만명이 공공부문에 종사하는데, 교육·의료·교통·행정 등 모든 공공서비스 부문의 효율성은 극도로 떨어진다.

부패도 심하다. 모히엘딘 투자장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수준으로 투명성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으나 코트라 카이로비즈니스센터의 유병우 과장은 “아직도 행정절차를 밟으려면 단계마다 웃돈을 찔러줘야 하는 형편”이라고 전했다.

2년간 카이로에 체류한 이탈리아 여기자 페데리카 초자는 “여기는 늘 공식 통계와 현실이 다른 나라”라고 말한다.

미국은 이집트에 해마다 군사·경제원조로 15억달러를 주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집트의 연간 재정수입 488억달러 중 3분의 1가량이 미국의 직·간접적 원조로 충당된다는 추정도 있다. 공식 성인 문자해독률은 71.4%이지만 실제로는 문맹이 절반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에이즈 감염·보균자 수는 인구의 0.1%라고 하나 실상은 이를 훨씬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공식 실업률은 9.7%였으나 실제는 2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카이로 중심가 자말렉의 매리엇호텔 앞에는 이슬람권의 ‘주말’인 목요일 밤이 되면 앳된 소녀들이 무리지어 나타난다. 성매매를 하기 위해서다. 카이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사막의 공동묘지를 집 삼아 사는 빈민들을 볼 수 있다. 이런 ‘무덤촌 주민’이 80만명에 이른다.

개혁이 성공할지는 내년 대선에 달려 있다. 경제개혁 관련 콘퍼런스에서 만난 한 경제관리는 82세인 무바라크가 다시 출마할 것으로 예상했다. 몇몇 젊은이들은 “가말이 대권을 물려받으면 연속성 있게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내비쳤다. 모히엘딘 투자장관은 “우리 정치체제는 매우 안정적”이라며 “대선이 어떻게 진행되든 성공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에 리스크는 없다”고 주장했다. 코트라의 노철 무역관장은 “이집트 경제가 크려면 연간 경제성장률이 10%는 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모두 일궈내기에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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