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 스파이’ 10여일 만에 집으로… 싱겁게 끝난 미·러의 ‘첩보전’

2010.07.13 17:38 입력 2010.07.14 01:18 수정
설원태 선임기자

지난 6월 말 냉전시대의 첩보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스파이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다. 미모의 여성 러시아 스파이가 미국의 유명인사들에게 접근했다든지, 첩보요원들이 번잡한 장소에서 접선해 같은 색깔의 가방을 순간적으로 주고받은 뒤 사라졌다든지 하는 일화까지 곁들여져 대중들의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이들 스파이에 대한 재판이 본격화되기도 전에 미국과 러시아는 10여일 만에 ‘스파이 맞교환(spy swap)’에 합의, 이번 사건은 소극(笑劇)으로 종료됐다. 미국에서 암약하던 러시아 스파이 10명과 서방을 위해 일하던 러시아인 스파이 4명은 지난 9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교환됐다. 외신들은 맞교환된 첩보원들의 추후 행방을 추적하고 있으나 이들은 또 다시 베일 속으로 사라졌다.

서방 국가를 위해 러시아의 핵정보를빼내다 체포된 러시아인 스파이 이고르 수티아긴(왼쪽). | AP연합뉴스 · 러시아의 소셜 네트워킹 웹사이트인 오드노크라스니키(클라스메이트)에 등록된 안나 채프먼(오른쪽). | ABC방송(인터넷판)

서방 국가를 위해 러시아의 핵정보를빼내다 체포된 러시아인 스파이 이고르 수티아긴(왼쪽). | AP연합뉴스 · 러시아의 소셜 네트워킹 웹사이트인 오드노크라스니키(클라스메이트)에 등록된 안나 채프먼(오른쪽). | ABC방송(인터넷판)

미·러 밀월속 냉전식 스파이 사건

지난달 말 러시아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얼굴을 맞대고 치즈버거를 먹으면서 미·러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던 동안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자국내에서 암약하던 러시아 스파이들에 대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메드베데프가 미국을 떠난 직후 미국 정부는 “더 이상 놔두면 달아난다”면서 스파이 11명(1명은 도주)의 신병을 확보해 지난달 28일 기소했다.

미국 언론은 스파이들의 활동을 열거한 FBI의 공소장에 근거해 러시아 첩보원들의 행적을 자세히 보도했다. 하지만 FBI가 기소한 혐의는 ‘간첩죄’가 아니라 ‘정식으로 등록하지 않고 외국정부를 위해 일한 죄’(미등록 로비죄, 형량 최고 5년 징역)와 ‘돈세탁 공모죄’(공모해서 첩보비를 돈세탁한 죄, 최고 형량 20년 징역)였다. 미국 기밀을 빼내 러시아로 전달한 구체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언론은 특히 미모의 여성 첩보원 안나 채프먼에 대해 선정적 보도를 일삼았다. 스파이가 11명에 달했다는 사실에 대해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간첩망 사건”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FBI는 첩보원들이 10여년 전부터 활동해 왔으며 7년 전 이들의 활동을 포착해 수사해오다 이번에 검거했다고 밝혔다. 보도들을 종합해 보면 러시아 첩보원들은 옛소련 KGB의 후신인 대외정보부(SVR)의 장기 첩보 프로젝트인 ‘불법자 프로그램(Illegals Program)’에 의해 훈련받아 파견된 요원들이다. 첩보원 세계에서 ‘합법자(legals)’는 외교관 자격을 갖고 공식적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불법자(illegals)’는 신분을 속이고 잠입해 외교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정보수집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평범한 이웃이 최첨단 기기 이용 암약

러시아 첩보원들은 대체로 뉴욕을 중심 무대로 하이테크 기기를 이용해 암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 첩보원 안나 채프먼(28)은 와이파이(WiFi)를 이용해 러시아 관리들에게 매주 수요일 정보를 전달했다. 그는 뉴욕 그리니치 거리의 반즈앤드노블 서점에 자리를 잡고 길 건너편에서 랩톱 컴퓨터를 만지는 러시아인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고, 4번가의 스타벅스 커피숍에 앉아 운전하면서 지나가는 러시아 관리에게 메시지를 날리기도 했다. 또 다른 첩보원 크리스토퍼 메초스는 오렌지색 가방을 들고 롱아일랜드 철도의 포리스트 힐스 역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맞은편에서 내려오던 러시아 외교관과 접선해 같은 색의 가방을 맞교환하고 사라졌다. 제3의 스파이 리처드 머피는 가짜 여권으로 로마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가 컴퓨터 한 대를 구입한 뒤 뉴욕의 브루클린으로 돌아가 한 커피숍에서 또 다른 공작원을 만나 이 컴퓨터를 전달했다.

러시아 첩보원들은 보통 미국인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신분을 숨겼다. 일부 결혼한 첩보원들은 미국인 이웃들에게는 평범한 부부와 부모로 알려진 채 오랜 기간 살아왔다. 그들은 자녀를 미국인 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임무는 미국의 정책결정자들과 접촉해 미국의 러시아 정책, 핵무기 정보 및 정책, 이란 정책, 세계정책 등 고급정보를 알아내 본국에 보고하는 것이었다. 안나 채프먼은 세계불황을 예고해 ‘닥터 둠(Doom)’으로 알려진 뉴욕대의 누리엘 루비니 교수에게까지 접근한 사실이 드러났다.

옛소련 스파이망 부활 여부 촉각

왜 냉전시대에나 있었을 법한 첩보활동이 정보가 공개된 요즘에도 진행되는 걸까? 뉴욕타임스의 최근 보도에 따르면 러시아의 ‘스파이 업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불법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자리잡고 있다. ‘불법자’들은 옛소련의 KGB 시절 오랜 기간 다른 사람으로 사는 훈련을 받은 다음 지하활동을 위해 수년간 또는 수십년간 대기했다. 이들은 임무를 수행하고 난 뒤 명예와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러시아 첩보원들을 붙잡은 FBI의 수사는 두 가지를 드러냈다고 해석된다. 옛소련의 ‘불법자’ 첩보원들이 현재에도 여전히 살아있으며 조직이 더 커졌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아울러 정치에 관한 정보와 고위 정책담당자들에게 접근하는 첩보원들의 임무가 전보다 더 직접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스파이 활동 기원은 1917년 10월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소련은 국제사회에서 외교적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외교적 보호가 없는 상태에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그 시절 정보기관은 외국의 사망한 어린이 기록을 찾아내서 첩보원들의 신분을 손쉽게 위장했다. 스파이로 오래 활동했던 갈리나 페도로바의 회고록에 따르면, 선발된 요원들은 이후 혹독한 훈련과 함께 고독과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있는지 심리 테스트도 받았다. KGB 시절 10여년간 스파이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유리 드로즈도프 장군(85)은 이들 스파이를 ‘천재’라고 불렀다. 서너 개의 외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실력에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기 때문이다. 옛소련 시절 루돌프 아벨, 코논 몰로디 등 스파이들은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현재에도 이들의 사진과 약력이 SVR의 홈페이지에 올려져 있다. 특히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총리는 1980년대 동독에서 KGB 공작원으로 근무한 바 있고 첩보원 출신으로 전례없는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다수의 미국 정책 결정자들이 러시아를 방문하며, 다수의 외국 로비스트들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요즘 정보를 입수하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런데도 왜 러시아인들은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한 지하 첩보활동을 했을까. 냉전 시기의 첩보활동에 관한 저서 5권을 낸 레오니드 멜친은 “러시아의 부처 이기주의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90년대 초 냉전체제가 붕괴하며 러시아의 정보조직은 와해됐다. 하지만 약 10년이 경과하면서 첩보 조직을 냉전 전 수준으로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짜고치는 도박’처럼 신속한 맞교환

지난 9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는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스파이 맞교환이 이뤄졌다.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한 미국 항공기에는 체포된 러시아 첩보원 10명이 탑승해 있었고, 모스크바를 출발한 러시아의 야크-42 여객기에는 서방을 위해 일하던 러시아인 정보원 4명이 타고 있었다. 두 비행기는 공항의 한 구석에서 꼬리에 꼬리를 대고 1시간30분 동안 나란히 섰다. 그 사이에 작은 차량 한 대가 스파이 10명과 4명을 실어 오고 가면서 교환을 끝냈다. 냉전시대에도 스파이를 맞교환했다. 통상 스파이를 구금한 상태에서 재판을 진행하며 석방 교섭을 진행했기에 여러 해가 걸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석방과정이 진행됐다. 러시아 스파이들은 미국법정에서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자백한 뒤 석방됐고, 서방을 위해 일하다 체포된 러시아인 스파이들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특별명령으로 석방됐다. 이번 스파이 사건의 특이한 점은 또 있다. 미국에 살던 러시아 스파이들의 자녀는 계속 미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서방을 위해 일하던 러시아 스파이들도 나중에 희망할 경우 러시아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BBC는 “요즘에도 첩보활동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으며 이것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의 첩보극에선 왠지 예전과는 달리 “짜고치는 도박게임” 같은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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