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균·정동영·손학규가 모르고 있는 것

2010.09.29 20:58 입력 2010.09.30 10:25 수정
이대근 논설위원

[이대근칼럼]정세균·정동영·손학규가 모르고 있는 것

정세균. 그처럼 온화한 얼굴의 정치 지도자는 요즘 보기 어렵다. 한국 정치의 아수라에서 그 말고 누가 저토록 부드러운 표정을 품을 수 있을까.

그건 분명 그의 인간적 장점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아니다. 그의 외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실례를 무릅쓴다면, 그의 얼굴은 원만한 것만큼이나 애매하다. 그를 보노라면 그 무엇이든 안개처럼 흩어지는 느낌이다. 명료함이 없다. 몰입이 안 된다.

그의 얼굴은 그의 정치이력의 반영이다. 만일 그가 다른 정치 경력을 쌓았다면 얼굴도 달라졌을 것이다. 괜한 시비가 아니다. 조건이나 상황이 나쁠 때 게임의 규칙을 바꾸거나 판을 뒤집고 돌파할 수 있는 것이 정치의 마술이요, 정치가 지닌 가능성이다.

[이대근칼럼]정세균·정동영·손학규가 모르고 있는 것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재능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쪽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명박 정권의 끝없는 도발을 무던히도 잘 견디면서 대과없이 그럭저럭 버티는 것이었다. 그 정도를 하기 위해서도 그로서는 최선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고 했다. 거센 바람이 불던 지난 2년, 질풍·노도처럼은 아니더라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한 그 세월에 그가 보여준 인내심과 평정심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그가 ‘큰 변화’를 내세운 것을 보면 그도 지난 2년에 만족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변화가 가장 필요할 때 변화하지 못한 그가 앞으로는 변하겠다는 걸 믿어줄 이가 있을까.

온화하고, 유연하고, 자유롭지만

정동영. 정치는 대중의 욕망과 기호에 반응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는 정치인이란 이름에 합당한 사람이다.

정치는 임기응변·유연성의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는 정치에 적격이다. 그러나 정치를 자기 철학이나 신념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정치는 그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정치는 곧 책임성이라고 해도 그와 맞지 않는다.

이렇게 정치의 어떤 측면은 그와의 친화성이 높지만, 다른 측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게 정동영에 관한 세상의 고정관념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자신의 과거 전부를 반성했다. 바닥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는 오버한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한 발 더 가야 한다. 과연, 그는 부유세를 주장하며 화끈하게 좌회전했다. 최상의 언어가 동원된 반성문을 보라. 절절하다.

그러나 말 한 번으로 과거를 다 털어버리는 게 가능한지 확신할 수 없다. 자기의 정치적 삶 전체를 부정하는 제2의 정치인생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번민의 시간이 필요한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웅숭깊은 성찰이라면 그 무게감은 있어야 한다.

최소한 경선 불출마라도 해서 그의 고뇌의 깊이에 사람들이 공감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스스로 짐을 벗어던진 그는 새처럼 훨훨 날고 있다.

자기 변호와 방어에 허덕이는 정세균·손학규가 불과 몇 달 전 정치얼룩까지 하얗게 지운 그를 부러워할 판이다. 그러나 과속 정치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걸 알까.

손학규. 민주당의 실패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이 없었다면 그가 당내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감으로 거론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민주당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다. 그러나 동전에는 양면이 있는 법. 그는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약점도 있다. 그것은 장점을 덮을 정도의 치명성을 띠고 있어 만약 그가 약점 관리에 실패하는 순간 그의 미래를 망치게 된다. 우선 한나라당 티를 벗는 일이 급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돌파력·책임성·출신 등의 약점

춘천 칩거 2년은 좋은 기회였다. 정동영 못지않게 변신을 선언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만 빈손으로 상경하고 말았다. 장문의 글을 발표했지만 현상 분석에 그쳤다.

정치인이 할 일은 분석이 아니라 해결하는 것이다. 그의 글에는 대안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 우선해야 할 것을 콕 집어 내지 못했다. 게다가 진보 경쟁에서 처지고 있다. ‘실사구시’니 ‘함께 잘사는 나라’니 했는데 꼭 한나라당 식이다. ‘실천 없는 진보의 도그마’ 비판은 민주당 안팎에서 수없이 하던 식상한 주제이다.

그것보다는 진보에 대한 충실성 과시로 약점을 가리는 게 우선이다. 그렇게 진보적 정체성을 확실히 하지 않으면, 진보의 방향으로 선회하는 야당판에서 그는 우파로 분류될 것이며, 그런 위치에서는 결코 진보개혁 진영의 대표자가 될 수 없다. 왜 그걸 모르는가.

<이대근 논설위원 grt@kyung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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