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시공은 바뀌어도 ‘욕망의 성’은 변함없이 그곳에

2010.10.01 21:48

젊음을 지키려 인육을 먹는 남작…각 시대인들의 아전인수격 시각

셜록홈즈·프랑켄슈타인 재해석…장르를 넘나들며 소설을 퍼즐화

▲퀴르발 남작의 성…최제훈 | 문학과지성사

[책과 삶]시공은 바뀌어도 ‘욕망의 성’은 변함없이 그곳에

최제훈(37)의 소설을 읽는 데는 몇 가지 즐거움이 있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대중문화 속 주인공을 소설에서 마주하는 즐거움이다. 셜록 홈즈나 프랑켄슈타인, 마녀, 다중인격의 살인자. 호러나 스릴러 영화의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최제훈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음은 이처럼 익숙한 캐릭터들을 관성적 장르의 문법으로 패러디하는 데 그치지 않고, 조각 내고 비틀고 뒤집어서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그의 솜씨를 지켜보는 즐거움이다.

그 솜씨는 한편으로 지적이고 논증적이면서도 재치와 유머가 곁들여져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또한 그가 이야기의 조각으로 만들어내는 패치워크는 인간과 세계의 욕망과 탐욕을 되비추게 하는 거울과 같은 존재로, 성찰적인 즐거움도 함께 선사한다.

[책과 삶]시공은 바뀌어도 ‘욕망의 성’은 변함없이 그곳에

최제훈이 이야기의 조각들로 만들어낸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첫 소설집 <퀴르발 남작의 성>을 내놓았다.

2007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을 받은 등단작 <퀴르발 남작의 성>은 드라큘라를 연상시키는 퀴르발 남작 이야기를 다양한 시간대의 화자를 내세워 재구성한 작품으로 이야기를 직조해내는 그의 솜씨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퀴르발 남작은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어린아이를 사들여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인육을 먹는다. 우아하게 피를 빠는 드라큘라가 아니라 살을 찢고 삶고 튀기는 퀴르발 남작의 이미지는 드라큘라보다 더 직접적으로 욕망을 형상화한다. 1932년 뉴욕에서 작가 미셸 페로와 출판사 편집자가 나누는 이야기, 1951년 할리우드에서 이를 영화로 만드는 제작자와 감독이 나누는 이야기, 1993년 서울의 한 대학교 강의 속 이야기, 2005년 한국 뉴스데스크의 기사 등 12가지의 작은 이야기들이 모여 동일한 텍스트를 두고 시대와 사회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32년 팽창하는 자본주의의 폭발을 맛본 대공황기의 미국 사회에서 퀴르발 남작의 성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로 해석되고, 1953년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미국의 한 기자는 퀴르발 남작의 성을 “독재자에 의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공산주의 체제”로 해석한다. 1952년 영화 주연을 맡은 여배우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주체적 여성 주인공 캐릭터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2005년 뉴스에서는 미디어에 의한 모방범죄가 언급되는 식이다.

[책과 삶]시공은 바뀌어도 ‘욕망의 성’은 변함없이 그곳에

뒤를 잇는 소설 <셜록 홈즈의 숨겨진 사건>에서는 창작자와 피조물이 뒤엉켜버린다. 셜록 홈즈가 자신을 창조한 작가 코넌 도일의 의문의 죽음을 파헤친다는 설정으로, 작가는 추리소설의 문법을 훌륭하게 따르면서도 그 안에 창작자의 욕망과 고뇌를 담아냈다. 코넌 도일은 자신을 뛰어넘는 인기를 누린 셜록 홈즈를 질투하고, 그를 소설 속에서 죽이고자 했지만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결국 다시 되살려내야 했다.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와 통제를 넘어선 상황과 마주한 코넌 도일의 고뇌를 셜록 홈즈가 추적해 들어가는 형식이다.

소설집 마지막에 실린 <괴물을 위한 변명>은 작가가 쓰고자 하는 글쓰기를 대변하는 작품론과 같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분석하고 재해석한 이 단편은 프랑켄슈타인의 탄생과 변화 과정을 추적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왜 시체들을 조각조각 꿰매어 썼을까요?…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모티프라서”라고 소설 속 화자가 던지는 질문, “퍼즐을 맞추듯 여기저기서 조각들을 찾아 모았죠. 그런데 이상하죠.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갈수록 편지 내용과는 다른 그림이 나타나더군요”라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동생 에르네스트의 대답 속에 작가의 소설론에 대한 질문과 답이 들어 있다.

소설집에 으레 나오는 ‘작가의 말’을 대신하는 에필로그 ‘쉿! 당신이 책장을 덮은 후’는 이 책의 백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모두 퀴르발 남작의 성에 모여 의문의 사체조각을 두고 추리를 벌인다. “시공을 뒤섞어 한바탕 난장을 벌여봅시다.” 1만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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