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미친극’

2011.01.19 21:16

여긴 이야기 속일까, 현실일까

이상의 시 중 ‘거울’이라는 작품이 있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못하는구료마는/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자기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이중적 삶에서 갈등하는 현대인의 내적 갈등과 자아분열을 묘사한 이 시는 거울을 두고 서로가 서로를 되비추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극단 백수광부 창단 15주년 기념작품인 연극 <미친극>은 이상의 시 ‘거울’과 꽤 닮았다. 몇개의 이야기 축들이 서로 맞물리며 되비추는 형태다. 연극의 도입도 이상과 금홍이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집에 나가기 위해 장미는 화장대 앞에서 짙은 화장을 하고, 그런 장미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남편 도연은 글쓰는 일이 유일한 위안거리다.

또 다른 이야기 축은 도연과 장미의 이야기를 희곡으로 쓰는 연출가와 그를 찾아온 사채업자 방학수가 이끈다.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던 방학수는 연출가에게 극본 속에 자신을 등장시킬 것과 작품 제목을 <착한남자 방학수>라고 할 것을 요구하고 연출가는 이를 받아들인다. 연습실의 젊은 배우들은 도연과 장미의 이야기가 담긴 대본으로 연습을 한다.

[리뷰]연극 ‘미친극’

여기까지는 관객에게 도연과 장미의 이야기가 액자형식으로 삽입된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다음 장면부터 관객은 혼란에 빠진다. 극중 극으로 생각했던 도연과 장미의 집으로 사채업자 방학수가 들이닥친다. 그는 장미가 빌린 돈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아내가 되기로 한 계약서를 빌미로 도연과 장미의 집에 기거한다. 방학수는 연출가를 위협하여 ‘대박’을 내서 큰 돈을 벌 것을 강요하고, 장미에게는 사랑을 강요하면서 ‘순정남’이 되고 싶어하는 모순된 욕망을 보여준다.

두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던 방학수의 욕망은 이내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져든다. 도연 역시 장미와 도연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쓰는 연출가에게 사채업자 방학수가 찾아와 벌이는 소동을 소재로 글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되비추는 ‘거울’처럼 연출가와 도연이 서로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객 역시 미궁에 빠진다. 맞물려 돌아가던 두 이야기가 모두 방학수의 현실이 되어버린 셈이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저주에 빠진 걸 알게 된 방학수는 결국 도연과 연출가를 죽이면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려 애쓴다.

오랜 시간이 지나 늙고 빈털터리가 된 방학수가 다시 무대에 오르면 이번엔 젊은 여성작가가 방학수와 연출가, 장미, 도연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고 밝힌다.

이야기의 저주에서 빠져나온 줄 알았던 방학수는 경악하며 다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거울 속에 비치는 ‘참 나와는 반대지만 꽤 닮은 나’의 모습, 방학수의 절망은 누구나 느끼는 ‘당혹’과 ‘미궁’이었던 셈이다.

현대인의 뒤틀린 욕망을 다소 어려운 구조로 풀어내는 이 작품은 연극적 재미와 탄탄한 메시지를 두루 갖추고 있다.

시공간을 뛰어넘으면서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연출 솜씨도 눈에 띈다.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이 겪는 잔혹한 현실을 촌철살인의 위트 넘치는 대사로 풀어낸 작가 최치언의 역량이 돋보이는 무대다.

연출 이성열. 김학수, 김승철, 장성익, 김민선 등 출연. 1월30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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