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분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다”

2011.04.01 21:05 입력 2011.04.01 21:12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오늘날 富는개인 노력이 아닌 사회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열매

▲ 독식비판(Unjust Deserts)…가 알페로비츠·루 데일리| 민음사

주인 없는 땅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치자. 마침 탐스러운 사과들이 주렁주렁 열렸다. 누구나 그 사과를 따 먹을 수 있다. 한데 어디선가 한 사내가 나타나 열심히 사과를 따서 자루에 담는다. 그 사내는 “내가 노력해 얻은 것”이라며 “이 사과들은 내 것”이라는 도덕적 권리를 강하게 내세운다. ‘노력’이라는 두 글자를 특히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온당한 일일까?

[책과 삶]“분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다”

<독식비판>이 던지는 물음표는 바로 그것이다. 공동저자인 알페로비치와 데일리는 “(사회적으로 축적된 지식이야말로) 오늘날 부의 압도적 원천”이라며, 그 지식은 “우리 자신의 노력을 거치지 않은 채 그냥 다가온 것들”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공짜 점심’이라는 것이다.

두 저자는 1987년 노벨상 수상자인 로버트 솔로가 제기한 ‘잔차’(殘差, residual)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잔차는 역사적으로 축적된 지식, 그것이 부의 산출에 미치는 총체적 효과를 일컫는 개념이다. 그것은 경제성장을 노동과 자본의 공급에 따른 것으로 설명했던 애덤 스미스의 이론과 궤를 달리 한다. 주지하다시피 스미스의 <국부론>은 토지·노동·자본의 요소에 집중할 뿐이며, ‘기술’은 다른 생산 요소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솔로는 노동과 자본 같은 전통적 요소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산출량의 변화에 주목했고, “‘잔차’야말로 전통적 투입 요소를 질적으로 결합해 효율성을 증가시킨 본질”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두 저자는 솔로가 제기한 ‘잔차’의 개념을 “진짜 확실한 것의 발견”이라고 격찬하면서,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과학, 기술, 문화의 발전을 이어받은 덕택에 현재의 부가 가능해졌다는 논지를 펼친다. 예컨대 “신경제의 영웅들인 세계의 ‘빌 게이츠들’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연방정부가 창조했거나 지원했던 결정적 연구와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아직도 진공관과 펀치카드로 일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거둔 부의 상당 부분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기술적 역량과 지식의 진보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면, 누가 그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알베로비츠와 데일리는 “사회 공동의 것인 진보”는 과학자, 엔지니어, 장인과 전문가의 단독적 활동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고 진단한다. “광부와 농부, 목수와 청소부, 요리사와 간호사, 도랑 파는 사람까지 모두가 생산지식을 창조하고 전달하기 위해 요구되는 조건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보다 폭넓은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길 권고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분배’의 문제, 즉 “축적된 지식의 열매”를 어떻게 나눠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위대하고 너그러운 과거의 선물을 어떻게 사회 전체적으로 사용하고 나누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생각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한 보상’이라는 것에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성공을 개인적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거나, 더 똑똑했기 때문에 성공했을 거라는 믿음을 갖도록 길들여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공정성의 오류’라는 것이 생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창조하거나 노력해서 생산한 것에 대해서는 마땅한 권리를 갖는다는 (도덕적) 관념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데, 이 ‘당연한 대가’라는 판단이야말로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감옥에 가는 것은 잘못”이라는 도덕적 논리를 경제적 보상에 그대로 적용한 오류라는 것이 두 저자의 지적이다.

‘공정한 보상’은 복지 프로그램에 비판적인 보수주의자들의 근거로 자주 활용된다. 일을 해서 소득을 얻는 빈민은 보호할 만한 가치가 있지만, 할일없이 빈둥대는 빈민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다. 1990년대 미국은 ‘복지도 응분의 보상’이라는 논리를 강하게 펼치면서 이른바 ‘생산적 복지’로 정책을 선회했다. 일을 열심히 했지만 가족을 부양할 정도가 되지 못하는 이들을 보조해주는 ‘근로 소득 지원 세제’ 같은 경우가 그 대표적 사례다.

알페로비츠와 데일리는 “우리 모두에게 선물로 주어진 거대한 몫을 어느 개인에게 과도하게 건네줄 이유는 없다”고 강조하지만, 이런 주장은 여전히 반발에 부딪히는 게 현실이다. 대개 실용적이고 기능적 차원에서 제기되는 반발이다. ‘무모한 분배 정의’가 경제에 해악을 끼치고 사회 전체에 손실을 입힌다는 ‘비관적 협박’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하지만 두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 연간 생산성 성장률이 최고조에 달했던 1951년부터 1963년에 한계세율이 가장 높았다. 1957년에는 40만달러 이상의 소득에 대해 91% 한계세율이 적용됐으며, 10만달러 소득의 한계세율은 75%였다. 반대로 감세와 규제완화가 시행됐던 지난 30년 동안 생산성에서 오히려 혼미한 상황이 빚어졌다. 성장률이 1.5% 이하로 둔화되거나 2~3%를 오가는 정도에 그쳤다.

그리하여 알페로비츠와 데일리는 “상위 1~2%에 대한 과세 증가, 사회보장세의 상한액 인상, 법인세 증액, 대규모 토지에 대한 상속세 인상” 등을 주창한다. 이렇게 해서 발생하는 재정 수입이 “연구, 교육, 건강, 노동의 질, 숙련 기술의 수준, 경제 일반의 기술 역량, 특히 미국의 노동력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을 고양시키는 데 사용”된다면 “경제성장을 높이는 것은 당연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아울러 새로운 조세 수입은 “보편적 건강 의료부터 국가의 취약한 인프라 유지와 개발까지 다양한 공공 목적에 할당될 것”이며 “저소득과 중위 소득 계층에 대한 지원 기반을 보다 광범위하게 구축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한 저자들은 다소 조심스러운 태도로 예일대 법학교수 브루스 에커먼과 앤 앨스톳이 주도하는 “진취적 제안”을 소개하기도 한다. 성인이 된 시민 모두에게 8만달러의 ‘자본 지분’(국가로부터 받는 종잣돈)을 배분하고, 개인들이 자신이 선택한 목적에 따라 각자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매년 2% 부유세를 재원으로 삼아 이 정책을 실현한다면 보다 많은 이들에게 지식 획득의 기회를 공평하게 마련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저변에는 오늘날 미국 사회의 극단적 현실이 깔려 있다. 2004년 기업 CEO의 평균 소득은 노동자의 평균 소득보다 431배 높았다. 2005년에는 상위 1%의 소득이 하위 1억2000만명의 소득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았다. 이토록 극단적인 부의 집중화는 미국의 사회경제적 고통을 더욱 증가시키면서 이뤄졌다는 것이 두 저자의 진단이다. “중산층 임금은 정체되고 제조업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의료비는 올라가고 대학 수업료는 천정부지로 뛰었으며, 시간당 실질 임금은 지난 30여년 동안 거의 인상되지 않았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래서 두 저자는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책무를 새롭게 해야 할 때”라면서, 진보적 분배 프로그램은 이제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의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 중 한 명인 가 알페로비츠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석좌교수이며 민주주의 연대(Democracy Collaborative)의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루 데일리는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초당파적 조직 ‘데모스’(Demos)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다. 원용찬 옮김. 1만8000원

[책과 삶]“분배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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