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여 경원대 총장 “산 오르듯 계속 활동할 것”

2011.05.30 19:27
이종탁|출판국장

“중국 삼자경(三字經)에 보면 효심이 지극한 어린 황향(黃香)이 아버지 이부자리를 자기 몸으로 덥힌다는 고사가 나온다.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가신으로 있을 때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온다. 그럼 한국에는? 추운 날 환자 몸에 청진기가 닿을 때 선뜩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도록 가슴에 청진기를 품고 지낸 의사가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지난해 9월 최고경영자들을 상대로 한 어느 강연에서 이길여 경원대 총장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성공 CEO에 대한 덕담 차원의 말이겠지만, 그가 든 한·중·일 세 예화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메시지는 배려다.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고 배려하라, 그런 사람이 성공한다는 것이다.

이길여 경원대 총장이 시골 소녀에서 의료·교육·언론·문화재단의 경영자가 되기까지 인생역정을 회고하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는 이 총장은 젊은이들을 향해 “잠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잠을 이기는 사람은 꿈을 이룬다”고 말했다. |김문석 기자

이길여 경원대 총장이 시골 소녀에서 의료·교육·언론·문화재단의 경영자가 되기까지 인생역정을 회고하고 있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다는 이 총장은 젊은이들을 향해 “잠자는 사람은 꿈을 꾸지만, 잠을 이기는 사람은 꿈을 이룬다”고 말했다. |김문석 기자

이길여 총장의 성공 스토리는 우리 사회에서 신화처럼 전해진다. 농촌 출신의 여자 의사가 혼자 힘으로 병원을 6개 세우고 신문사와 대학까지 인수해 교육·의료·문화재단을 이끄는 그룹의 총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총장에 이사장에 회장까지 그가 가진 현직 직함만 수십개, ‘건국 이후 가장 크게 자수성가한 여성 CEO’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 오늘의 이길여가 있기까지 그는 과연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성공의 원동력은 무엇이며, 좌절과 실패는 얼마나 맛보았을까. 결혼은 왜 하지 않았으며 독신으로서 후회는 없는 걸까. 부모에게 물려받지 않고 번듯한 기업의 CEO가 된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운 요즘 세상, 그의 성공신화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에 담고 이 총장에게 인터뷰 신청을 했더니 “대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이야기할 수 있어 반갑다”며 흔쾌히 수락의사를 전해왔다. 인터뷰는 지난 24일 서울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있었다. 그의 삶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가는 질문부터 던졌다.

-지금은 대학 운영에 더 신경쓰시지만 유명인사가 된 것은 ‘의사 이길여’로서 아니겠습니까. 어렸을 때 시골에서 어떻게 의사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정확히 언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어렸을 때 의사놀이를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때는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당골(무당의 전남 방언)이 와서 됫박에 쌀을 넣고 하얀 천으로 싸서 돌리며 ‘귀신 물러가라’ 하는 식으로 빌곤 했어요. 그걸 보고 내가 친구들에게 똑같이 해줬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면 싹 낫더라고요. 하하.”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가짜 약으로 심리적 치료효과를 내는 것)네요.

“그런 셈이죠. 당시는 약도 없고 의사도 없어서 병나면 앓다가 죽는 게 보통이었어요. 내 친구도 그랬고, 아버지도 그렇게 가셨어요. 그러니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고쳐줘야지 하는 것은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생각이었어요. 내가 독특한 게 아니라 시대상황이 그랬어요.”

-그래도 실제 의사의 길을 걷는 사람, 그중에서도 여자는 아주 소수잖아요.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의사가 되려면 어떡해? 공부 잘해야 해, 그러니까 1등 해야 해, 이렇게 생각했어요.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그가 살던 전북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에 전깃불이 들어오는 곳은 방앗간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린 길여는 저녁밥 먹고 나면 방앗간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깜깜한 길을 혼자 걸어서 돌아오곤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은 비결 아닌 비결인 셈이다. 공부뿐 아니라 놀이에서도 그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당찬 성격이었다. 남자 아이들을 제치고 반장도 도맡아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가 왕초였어요. 그때 별다른 놀이기구가 없으니까 수수깡 속을 빼고 막대기에 끼워돌리는 바람개비놀이를 많이 했거든요. 이걸 누가 잘 돌리나 경쟁을 하는데 내가 최고였어요. 빠른 속도로 달리면 빨리 돌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산으로 올라가면 잘 돈다는 걸 나는 알았거든요. 이런 놀이가 나를 성장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바람개비는 이 총장의 삶을 나타내는 표상(表象)이다. 바람개비는 가만히 있으면 돌지 않는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람이 뛰어다니며 바람을 일으켜야 돌아간다. 바람 부는 대로 바람에 실려 사는 게 아니라, 바람을 만들고 바람에 부딪히며 헤쳐나가는 것, 그게 이길여식 삶이다. 오늘의 그를 있게 한 팔할은 바람개비인 것이다.

-태어날 때 사내아이가 아니어서 할머니가 크게 실망했다면서요, 강인한 성격은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나요.

“할머니는 남존여비 사상에 젖은 고루한 분이셨어요. 딸 낳았다고 어머니를 많이 구박했지요. 그렇지만 한 편으로 개척정신이 강하고 집안을 일으키는데 열성이었어요. 내 자식이 반경 10리 안에서 남의 땅 밟지 않고 다니게 하겠다고 했고, 실제 땅을 사들여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비교적 부유한 집에서 자랄 수 있었죠. 나를 강하게 키운 건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는 그 당시에도 만주까지 친구들과 관광을 다녀올 정도로 배포 큰 여자였어요.”

그가 세상에 나온 날, 할머니는 방 안에 누워 있는 며느리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뭔 벼슬했다고 처자빠져 있능겨!” 그래서 출산 직후의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부엌에 들어서면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면박을 주었다. “저것 아기집에는 딸 종자만 들었는가 본디 어째야 쓰까이.” 산모 먹이려고 미역을 물에 담그는 것을 보고는 “미역국은 뭔 벼슬했다고 미역국이여” 하며 미역 가닥을 꺼내 홱 내던졌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어린 길여를 껴안고 “두고 봐. 내 기필코 이 아이를 아들보다 나은 딸로 키우고 말거구먼” 하며 다짐했다고 한다.

-부친은 어떤 분이었습니까. 자서전에는 간단하게만 나와 있어서요.

“할머니가 열두번째로 낳은 자식이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학교에도 안 보내고 집에서 독서당 만들어 한학만 가르치며 오냐 오냐 하며 키웠대요. 아버지는 일본말도 못했다고 해요. 대신 시조 읊고 노래도 하는 한량이었는데 정미소 사업을 했어요. 중 2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많지는 않아요.”

많지 않은 기억 중에 좋지 않은 것도 있다. 아버지는 딸이 호남의 명문 이리여중(당시 6년제)에 입학했는데도 할머니와 함께 진학에 반대했다. “가시내가 글자나 깨쳤으면 됐지, 상급학교는 뭔놈의 상급학교다냐? 여자 많이 배워 좋을 일 없다. 팔자만 세지” 하면서. 이때도 그의 어머니가 “내 머리라도 잘라서 보내겠다”며 나서는 통에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교에 다녔으니 이 악물고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열정과 집념, 도전정신, 자신감은 그렇게 형성됐다.

-인천에서 ‘이길여 산부인과’를 연 게 성공으로 가는 첫발이었죠?

“미국 유학에서 돌아와 환자를 보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무지하거나 돈이 없어 병원치료를 못 받고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사실 산부인과는 간단한 병이 많아요. 그중 하나가 성병인데 인천에는 옐로하우스 때문에 성병환자가 엄청 많았어요. 그때는 슈퍼박테리아가 없었기 때문에 성병 환자는 항생제만 맞아도 100% 살아요. 죽을 사람 많이 낫게 해줬죠. 저절로 명의가 됐어요.”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 안 받았다면서요, 그래도 병원 운영에는 괜찮았나요.

“명의라는 소문이 나면서 환자가 줄을 이었어요. 산부인과는 환자가 옷을 벗고 진찰대에 누워 다리를 벌려야 진료가 시작됩니다.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려요. 생각 끝에 진찰대를 3대 놓고 바퀴 달린 의자를 샀어요. 그 의자에 앉아 한쪽 진료가 끝나면 앉은 채 엉덩이로 의자를 주르르 밀어서 옆 진찰대로 옮겨 진료하곤 했어요. 의자 바퀴가 고르지 않아 옮기다 뒤로 자빠진 적도 있죠. 환자가 그렇게 밀려오는데 돈 걱정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는 그렇게 20년을 보냈다. 오로지 병원 일에만 몰두하던 시기였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환자를 맞으려면 밥 먹다가도 뛰어가고 자다가도 달려가야 했다. 밥도 하루 한 끼만 먹는 날도 허다했다. 책 읽을 시간도, 텔레비전 볼 시간도 없었다. 어느날 창밖에서 눈 내리는 게 보이면 “아 겨울이구나” 하고 느끼고, 또 어느날 소나기가 오면 “어 벌써 여름인가” 하며 지내는 세월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 답답한 느낌이 밀려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걸까.” 마흔셋에 찾아온 우울증이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고, 일본으로 두번째 유학을 떠났다.

-결혼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내내 일에 파묻혀서?

“전혀 생각 안 해봤어요. 결혼에 흥미를 못 느꼈던 것 같아요. 나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언니 말이 내가 미국 가기 전에 선도 많이 봤다고 그래요. 선보고 와서는 누구는 어때서 마음에 안드네, 그랬다는 거예요.”

-선본 기억이 안 난단 말씀인가요?

“그래요. 전혀 없어요. 곧 미국 간다고 생각해서 그랬는지 남자가 끌리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 시시했던 것 같아요.”

-미국 유학 중 로맨스가 있었다면서요?

“그렇죠. 교포 사업가였는데 한동안 주말마다 만나 데이트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날 그 남자가 청혼을 하기에 거절했죠. 결혼해서 이 사람이 내 남편이 된다? 그건 아니다 싶었거든요. 헤어지고 나서 많이 울었어요. 그런 거 보면 내가 그를 진짜 좋아했던 것 같아요.”

이 총장이 털어놓는 생애 유일한 로맨스는 그렇게 한 여자의 가슴속에 아련한 아픔을 남긴 채 끝이 났다. 가슴속에 멍울이 깊이 새겨졌는지 5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를 회고하는 그의 눈가에 촉촉한 기운이 살짝 스며드는 것 같았다.

-자서전에 보니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의사로 태어나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더군요. 독신주의자도 아니라면서 그 말 진심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결혼했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다 못했을 테니까요.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자식 뒷바라지 해야지, 남편 챙겨야지 어떻게 24시간 환자를 보겠어요? 아마 12시간도 어려울 거예요. 내가 결혼했다면 좋은 아내, 좋은 엄마는 됐을 것 같은데 국가를 위해 큰일은 못했을 것 같아요.”

-여자는요?

“여자여서 후회는 전혀 없어요. 내가 고추 달고 나왔으면 어머니가 호강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 외 남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은 전혀 없거든요.”

-여자여서 좋은 점은 뭔가요?

“많죠. 옷도 직접 만들어 입고. 여자는 섬세하고 집념이 강해요. 남자들은 연애하고 그러느라 뭘 하는데 차질이 많죠. 그때는 남자는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여자는 안된다는 관념이 있었거든요. 여자는 자제를 했어요.”

-늘 그렇게 착하게 살았습니까? 평생 일탈이란 거, 한 번도 해보지 않았나요?

이때 이 총장은 즉각 답을 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왜 없겠어요? 있어요. 고등학생 때 담배도 피워봤어요.”

-그래요? 1등만 하는 모범생의 일탈치고는 아주 센데요.

“친구 집에서 월반시험 공부를 할 때였는데 호기심이 나더라고요. 둘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 모금씩 피워봤는데 질식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담배는 절대 피우는 게 아니다, 그때 그렇게 생각했죠.”

-그게 일탈의 유일한 사례인가요?

“아니, 또 있어요. 6·25 전쟁으로 전주에서 전시연합대학을 다닐 때였어요. 친구 넷이 학교를 땡땡이치고 걸어가는데 마침 군인 네 명이 탄 지프가 지나가다가 우리 보고 타라고 해요. 그래서 그 지프 타고 군인들이랑 시시덕거리며 하루 종일 돌아다녔어요. 놀 때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집에 돌아오니 엄청나게 후회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울면서 반성문 썼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도 반성문 쓰라고 시키지는 않았는데.”

-그런 자기 인생에 불만 없습니까. 스스로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하나요?

“나는 성공이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매 순간 행복했다고 생각하지요. 내 인생의 어느 순간을 잘라놓고 보아도 행복하고 만족하고 후회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행복합니다. 이렇게 인터뷰 하는 순간도.”

-보통 사람은 좌절과 실패, 회한이 있게 마련인데요.

“그렇게 말하면 나에게도 물론 있지요. 전체적으로 봐서 행복하다는 거지, 좌절이나 실패 왜 없겠어요? 다만 누가 콕 집어서 얘기하기 전에는 실패 같은 거 생각이 안 납니다. 지금도 우리 대학에 통합 어려움이 있잖아요. 결과적으로는 행복할 것이지만. 그런 것도 다 즐겁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요즘 그가 가장 신경쓰는 문제는 경원대와 가천의대의 통합이다. 두 대학을 합치면 입학정원 기준으로 수도권 3위 규모의 매머드급 대학이 된다. 하지만 기존의 학교명칭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동문회 등에서 반대 목소리를 높여 작업이 순탄치 않은 것을 언급한 것이다.

-과거 경원대와 경원전문대를 합칠 때도 많은 진통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도 두 대학의 통합을 굳이 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보고 왜 사서 고생하느냐, 그 시간에 좋은 데 가서 맛난 거 먹고 골프나 치고 지내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자문을 해봅니다. 지금 가천의대 잘되고, 길병원 잘되고, 경원대 상승하고 있는데 왜 이걸 해야 하나. 결론은 해야 한다, 그래야 윈윈하기 때문입니다. 통합하면 10대 사학이 될 거거든요. 빤히 앞이 보이는데 안 하면 직무유기예요.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어요. 난 그런 생각으로 합니다.”

-지금까지 여러 건의 인수·합병을 하면서 삶의 영역을 넓혀왔습니다. 앞으로 어디까지 나갈 건가요.

“그 질문도 많이 받는데요, 내 인생은 평탄한 길을 걷는 게 아니라, 산을 계속 올라가는 겁니다. 정점이 있는 게 아니어서 계속 가는 거예요. 내가 쓰러지면 뒤에서 다시 올라가고. 그러니까 많은 것을 이뤘으니 이제 만족한다, 그런 거 없고 하나의 과정을 가는 거라 생각합니다.”

-죽어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최선을 다하고 간 사람이죠. 역사는 줄로 이어지는데 거기서 뭔가 반짝거리는 점을 찍고 가야 한다, 젊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다 산 인생, 그런 거 없어요. 그저 가천길재단의 설립이념인 ‘박애 봉사 애국’을 철저히 지키고 간 사람, 묘비명에 그렇게만 적으면 만족입니다. 그래도 젊은이들에게는 점을 찍고 가라, 아무렇게나 살지 마라, 성공하려면 4시간 이상 잠자지 마라,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시대가 아무리 달라졌다고 해도 그건 여전히 유효하거든요. 열정을 갖고 도전하는 인생은 언제나 멋지다는 것 말이에요.”

이길여 총장은 여의사로 국내 최초로 의료법인 설립

길여 어린이가 생전의 어머니와 함께한 모습.

길여 어린이가 생전의 어머니와 함께한 모습.

이길여 총장을 만나 이야기하다보면 세 번쯤 놀라게 된다. 그 나이에 주름살 하나 없이 매끈한 얼굴 피부를 갖고 있다는데 우선 놀라고, 수십년간 하루 4시간 이상 잠자지 않았다는 말에 또 한번 놀라며, 골프에서 그렇게 어렵다는 에이지 슈트(자기 나이와 같거나 적은 타수를 기록하는 것)를 지난해 달성했다는 이야기에 마지막으로 놀란다.

그는 건강한 신체와 피부를 부모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틈나면 걷기를 하고 집에서는 러닝머신을 해 건강관리를 한다.

그는 병원을 일으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여의사로는 국내 최초로 의료법인을 설립, 개인 재산을 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딸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지지해주던 어머니가 이 때 딱 한번 반대했으나 이 총장은 재산 물려줄 남편도, 자식도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이 총장은 아버지가 지어주신 ‘길여’라는 이름에 아주 흡족해한다.

어렸을 때는 촌스럽게 느껴져 무척 싫어했지만 지금은 이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한다. 가운데 길(吉)자를 따서 길병원, 길재단을 세운 게 그 때문이다. 정신문화연구원장을 지낸 고 유승국 박사가 지어준 가천(嘉泉)이란 호에도 애착이 많다. 가(嘉)는 파자(破字)를 하면 길(吉)이 스무번(十十) 더해진다(加)는 의미이고, 천(泉)은 샘을 뜻하는 말이니 좋은 일이 쉴새없이 샘솟는다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이길여 총장을 두고 하는 말일까.


◇ 약력

△1932년 전북 옥구(현 군산시) 출생 △서울대 의대 입학·졸업 △미 퀸스종합병원 수련의 △일본 니혼대 의학박사 △이길여 산부인과 △양평길병원, 철원길병원 등 설립 △한국여자의사회 회장 △가천문화재단 이사장 △가천미추홀청소년봉사단 설립, 총재 △한센국제협력후원회 회장 △서울대 의대 첫 여성 동창회장 △길병원 이사장 △경원대 총장 △경인일보 회장 △가천뇌과학연구소, 이길여암당뇨연구원 설립 △과학훈장 창조장(1급)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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