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괴물들’의 사회

2011.07.01 21:16 입력 2011.07.01 21:18 수정
노명우 | 사회학자

성장과 성숙

들풀조차 자라면 변화한다. 어린 싹도 세월을 견디며 성장하면 꽃이든 열매든 결실을 맺는다. 비바람을 견뎌낸 세월이 헛되지 않았음을 일깨워주는 순간이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도 다르지 않다. 사회도 인간도 성장의 끝무렵에선 성숙의 순간을 맞이해야 한다. 성숙은 성장통을 겪은 후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성충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과도 같다. 이른바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성장했지만 성숙없는 사회라면 비아냥거림을 피할 수 없다.

매우 억울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다. 아저씨 혹은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누구도 품격과 인격을 연상하지 않는다. 불행하게도 아저씨와 아줌마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명사는 뻔뻔함, 능청스러움, 악착스러움 등이다. ‘혈연관계가 없는 남자 어른을 친근하게 이르는 말’이라든가 ‘아버지의 친형제를 제외한 남자를 이르는 말’과 같은 사전에 등장하는 아저씨의 뜻은 잊어야 한다. 상식적으로 사용되는 아저씨라는 단어에는 돈 자랑이나 지위 자랑질을 일삼는 상쾌한 느낌을 주지 못하는 중년남자라는 뉘앙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다. 어느 누구도 ‘나이든 여자를 가볍게 또는 다정하게 부르는 말’이라는 뜻을 아줌마라는 호칭에서 떠올리지 못한다. 우리의 뇌리에 박힌 아줌마의 모습은 붐비는 지하철에서 좌석을 확보하겠다고 몸을 날리거나 새치기를 일삼는 얌체 같은 중년여자다. 나이는 먹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중년 시절엔 그나마 아저씨 아줌마라는 소리만 듣지만,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꼰대’라는 더 경멸적인 표현을 들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성장하면 결실을 맺는 건 자연의 이치이나, 비료라는 촉매제를 만나면 식물은 좀더 빨리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인간에게 비료 같은 촉매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장을 촉진하여 성숙의 순간을 당겨주는 배움이다. 배움에 대한 기대와 믿음은 깊고도 오래됐다. 자식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했다는 맹자 어머니 이야기부터,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 했던 공자에 이르기까지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운 위인들은 부지기수다. 사람은 배워야만 금수와 구별된다고 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해서”라는 자조 속에는 배움으로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의 한이 스며들어 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배우지 못해서 나라도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가 미친 듯이 배웠다. 배우지 못한 게 한이었던 예전 부모는 소 팔고 논 팔아서라도 자식은 학교에 보냈다. 요즘 부모는 자식 교육을 위해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한다. 이제 배움에 관한 한 한국은 지표상으로는 전 세계가 부러워할 만한 나라다. 우리 학생들의 학업능력은 OECD국가 최상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 사람 중 읽고 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작 1.7%이다. 대학진학률은 2009년 기준으로 무려 81.9%이다. 2010년에는 1만322명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인구 1만명당 박사학위 취득자는 1985년 0.3명에서 2009년 2.1명으로 증가했다. 2010년 발행된 도서의 종수는 4만291종에 이를 정도로 한국은 지식사회다. 이 정도로 엄청난 양의 ‘배운 사람’을 배출하는 성장한 사회라면, 군자는 아니어도 최소한 성숙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품격 있는 나라여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움에 투자했지만 ‘싸가지 없는 애들’과 ‘추접스러운 중년’과 ‘나잇값 못하는 늙은이들’이 뒤섞인 지하철 풍경은 배움은 사람을 바꾸어 놓을 것이라는 철석 같은 믿음을 접도록 만든다.

한국의 출산율만 OECD 최저가 아니다. 성장이 성숙을 낳고 배움이 인격을 낳는 비율을 성숙률이라 계산한다면, 한국은 그것에서도 OECD 국가 최저일지 모른다. ‘유식’과 ‘교양’이, ‘성장’과 ‘성숙’이 결합하지 않은 ‘얼치기 배움’이 판치는 이 사회에서 출세의 수단으로, 돈벌이를 위한 투자로 더럽혀진 배움의 본뜻을 찾아 임마뉴엘 칸트(1724-1804)의 아주 오래된 책 <교육학 강의>(조관성 옮김·철학과현실사)를 펼친다.

‘자기주도학습’이니 ‘PBL’과 같은 온갖 교육공학적 용어들이 지배하고, 일류대학을 갔다는 이유만으로도 ‘공부의 신’이라 불리는 가벼운 세상에서 철학자의 교육학 강의는 왠지 낯설다. 게다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는 철학 3부작으로 유명한 칸트가 교육에 관한 책을 썼다니 더욱 신기하게만 느껴진다. 칸트는 1770년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논리학 담당 교수직을 얻었는데, 당시 철학부 소속 교수들은 교육에 관한 강의를 의무적으로 개설해야 했다. 칸트는 1776년, 1780년, 1783년, 1786년의 네차례에 걸쳐 교육에 관한 강의를 열었고, 이 강의용 대본이 1803년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의무적인 강의에서 출발했지만, 담긴 내용은 계몽주의의 이상을 밝힌 유명한 1783년의 논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의 연장선에 놓여 있기도 하다. 칸트는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칸트는 성숙한 인간으로의 완성 가능성을 배움에서 찾았다. 그래서 배움에 대해 남다른 기대를 걸었다. 부모들은 배움을 통해 “자녀들이 세상에서 성공하여 입신양명하는 일에만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며, 국가 통치자들은 배움을 “그들이 추구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한갓 도구” 정도로 생각하지만, 철학자의 눈엔 배움 속에서는 인간이 야만에서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는 과정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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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보기에 인간의 동물적 야만성을 규제하는 훈육에서 시작한 교육의 최종 목표는 이래야 한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어떤 목적, 여러 가지 목적들에 숙달되고 숙련된 유능한 인간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하여 오로지 선한 목적들을 삶 속에서 지향하고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성향을 길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목적들이란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동의되고 승인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추구되는 목적들을 뜻한다.”(39쪽) 선한 목적에 도달하는 도덕화가 교육의 최종 목표였기에, 배움을 통해 성숙한 사람은 배웠기에 선하고, 배움과 선함이 조화롭기에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선미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등수를 부르는 호칭으로 격하된 사회에서 배움을 통한 진선미의 통합을 강조하는 철학자의 모습은 고리타분하게 느껴진다. 그 고리타분한 느낌은 칸트가 시대에 뒤떨어진 주장을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오랫동안 성숙이라는 단어를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성숙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고어처럼 느껴지는 사회, 그 사회가 바로 ‘성장 물신성’의 사회다. 양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한 ‘성장’이 ‘성숙’을 대체해 삶의 목표가 되는 사회에선, 배움조차 성숙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수단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성장숭배 사회에서는 배움도 스펙의 도구로 전락했다. 전 국민이 죽어라 공부하고, 졸업 후에도 승진하기 위해 자기계발에 매진하는 지식사회의 외양은 갖추었어도, 성숙이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배운 사람과 성숙한 사람은 일치하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은 올바름과 선함과 아름다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사람이다. 성장했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배운 지식을 사용해 금융사기를 친다. 배우지 못한 장발장은 고작 촛대나 훔칠 뿐이지만,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인간은 못 배웠지만 성실한 사람들의 삶을 통째로 파괴하는 괴물의 짓을 서슴지 않는다.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최고로 좋은 대학의 입학 성적이 가장 높은 학과 출신인 사람이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 좋은 머리를 이용해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걸 보고 있노라면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은 “아는 것이 독”인 경우다. 성장한 만큼 성숙하지 못할 때, 성숙 없이 웃자라기만 한 인간은 거인병에 걸린 괴물과 다름없다.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 평범한 단어들을 보석처럼 잘 조합하는 사람이 빚어내는 언어는 참으로 감칠맛 난다. 그 감칠맛 나는 언어는 읽어서 배부른 눈의 만찬을 제공한다. 언어 능력만을 놓고 보자면 괴테와 나치의 선전부장 괴벨스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하지만 한 명은 언어능력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존경받는 대문호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차라리 괴벨스가 ‘일자무식’이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악인 괴벨스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배웠지만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이렇듯 괴벨스처럼 위험한 괴물에 다름 아니다.

그 높은 교육열과 화려한 교육관련 통계지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 사회에서 나타나는 ‘배운 괴물들’의 쇼가 끝나는 순간은 대체 언제쯤일까? 성장이 성숙으로 귀결되지 못함이 너무나 분명할 때, 차라리 성장하지 않겠다는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 오스카의 선택은 오히려 성숙한 결정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키 작은 오스카가 웃자란 괴물 괴벨스보다 낫지 않은가?

<노명우 |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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