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다즐링의 햇빛과 별빛을 머금은 손바느질한 홍차 소포를 받고 싶은 날

2012.02.14 21:11
글 윤미화 http://pporoo.khan.kr

별을 사막에서 바라보면

별을 사막의 바람이 자고 난 뒤 바라보면

별을 가진 이는 아무도 없고

별이 우리를 가지고 있지만

-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중

오래전 TV에서 인도 북부 다즐링 여행 편을 봤다. 홍차 생산지로 유명한 다즐링은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지역이다. 다즐링에 가는 방법으론 자동차와 협궤기차가 있다. 외국인 관광객은 대개 협궤기차를 탄다.

세 칸, 네 칸짜리 협궤기차는 규모가 작아 장난감 기차로도 불리는데, 다즐링은 아니지만 나도 협궤기차를 탄 적이 있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에는 인천 송도역에서 수원역까지 협궤기차가 다녔다. 친구들과 이 수인선을 타고 수원에 가서 수원성을 한 바퀴 돌고, 역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셨다. 지금은 아파트 숲이 무성하지만 그때만 해도 들판과 야트막한 구릉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안산도 기억난다.

기차는 송도역을 출발해 원곡을 지나고, 소래포구와 군자를 지나 수원역에 닿았다. 할머니들이 소래포구에서 생선을 사서 붉은 고무 대야에 담아 수원역이나 송도역으로 내다팔았다. 바람 불고 비 오고 눈이 내려도 할머니들은 생선 대야를 기차에 싣고 다녔다.

인도 다즐링의 우체국에서는 손바느질로 소포를 포장해 촛농으로 봉인한다.

인도 다즐링의 우체국에서는 손바느질로 소포를 포장해 촛농으로 봉인한다.

다즐링 협궤기차를 보다가 할머니들을 떠올렸다. 쪼글쪼글 주름진 얼굴과 볕에 그을린 두 뺨이 노을빛에 홍시처럼 물들던. 인사라도 하려 하면 오물오물 입을 열고 미소 띠던 할머니들은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별이 되었을 것이다.

다즐링의 협궤기차는 설산(雪山)을 마주보는 꽃 언덕에서 기다린다. 가쁜 숨을 내쉬며 올라온 언덕에서 관광객들은 감탄한다. 설산에서 니르바나(열반)를 만나기라도 하듯 꽃밭 황홀경에 빠진다. 하지만 내 시선이 줄곧 멈춘 곳은 화려한 꽃 언덕도 아니고 장엄한 태고를 그대로 지닌 히말라야 산등성이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손바느질하는 남자가 있다. 다즐링 우체국에 가면 만난다. 인도의 소포는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종이상자에 물건을 넣고 테이프로 봉하지만 인도는 손바느질한 포장을 쓴다. 다즐링 홍차를 사서 우체국에 가면 바느질하는 아저씨가 포장을 맡는다. 차 봉지를 종이상자로 꼼꼼히 싸맨 뒤 그 위에 흰 천을 덧댄다. 네 모서리와 가운데에 감치기를 한 다음 붉은 촛농을 녹여 꿰맨 부분에 붙인다. 접착력이 우수해서 꿰맨 곳이 터지지 않는단다. 일부러 찢기 전에는 봉한 부분이 떨어지지 않으니 분실을 막기 좋다. 소포를 훔치려 작정한다면 떼어내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만, 붉은 촛농을 보는 순간 도둑은 잠시 갈등한다. 기어이 그 붉은 꽃잎을 따겠느냐.

손바느질한 흰 천으로 곱게 싸맨 홍차 선물을 받는 이는 누구일까. 누군가를 그윽하게 떠올리는 일은 사랑하는 마음이다. 남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북쪽의 설산에 닿아 꽃을 피우는 곳, 다즐링. 꽃이 진 자리마다 오종종한 새 깃 같은 찻잎이 달린다. 언덕과 계곡과 구릉마다 바람이 지나고 찻잎은 바람 속에서 제 작은 몸을 흔든다. 다즐링 찻잎은 낮에는 햇빛을 머금고 밤에는 별빛을 담아 자란다.

미간에 붉은 점을 찍은 아낙들은 햇빛과 바람이 키우고 별빛이 담긴 찻잎을 딴다. 찻잎을 따서 받은 돈은 일용할 양식이다. 아이들 신발과 저녁 찬거리를 사 들고 집에 간다. 어두컴컴한 부엌 선반 위에 놓인 질그릇에 땡그랑 동전을 넣어두고, 밤은 깊다. 깊은 밤 별빛은 함석지붕 위에 눈가루처럼 내리고 찻잎에 숨을 심는다.

문득 다즐링 우체국에서 손바느질한 홍차 소포를 받고 싶은 밤이다. 마당에 별이 가득 쏟아진다.

■ 글 윤미화
■ 블로그 http://pporoo.khan.kr
글쓴이는 충남 홍성에 사는 농부입니다. ‘파란 여우’라는 필명으로 인터넷에 서평을 올리고 있으며, 서평집 <깐깐한 독서본능>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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