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안회남 ‘불’

2012.02.24 19:38 입력 2012.02.24 19:52 수정

새로 살려는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어라

안회남은 1909년 <금수회의록>을 쓴 작가 안국선의 외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안국선은 개화기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도쿄전문학교 정치과를 나와 독립협회의 이승만, 이상재 등과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이숙당과 결혼했으며 한때는 청도 군수도 지냈다. 이후 경제계에 투신하여 금광과 미두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안회남(본명 필승)은 수송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보에 입학했다. 동창생인 김유정과는 그가 필승에게 마지막 유서를 남겼을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1927년 부친이 죽자 안회남은 학교를 그만두고 ‘개벽’에 입사해 십여년간 창작에 전념했다. 193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발(髮)’이 입선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 구인회 동인들과 함께 활동을 했던 안회남의 초기 작품은 평론가 김동석이 ‘부계의 문학’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로 신변적 내향성을 띠고 있었다. ‘연기’ ‘명상’ ‘소년과 기생’ ‘온실’ 등은 심리묘사 위주의 신변잡사를 다룬 사소설적 경향이 주를 이룬다. 그는 소설의 목표가 인생의 단면을 묘사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안회남의 작품 세계는 1938년 ‘조광’에 발표한 ‘그날 밤에 생긴 일’ 이후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현실에 관심을 갖고 일제 강점기에 좌절하는 지식인의 이야기를 다룬 ‘병원’을 ‘인문평론’에 발표한다. ‘개벽’이 폐간된 뒤 상사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1940년에 향리인 충남 연기군 전의면으로 이주한다. 학예사에서 <탁류를 헤치고>를, 조선출판사에서 <대지는 부른다>를 간행한 뒤 1944년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탄광으로 징용당한다. 이듬해 해방과 함께 귀국하여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소설부 위원장이 된다. 이 시기의 문제작들인 ‘폭풍의 역사’ ‘농민의 비애’ 등은 해방 이후 미군정 치하의 농민 생활이 일제 강점기에 못지않게 비참해지고 있으며 친일 잔재의 폐해가 극심해지고 있는 사회상을 다룬다.

안회남은 1948년 단정이 수립된 뒤 남로당이 해주에서 소집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되고, 1949년 ‘민주조선’ 문화부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시기에 종군작가단에 참가해 서울에 왔다가 박태원, 현덕, 설정식 등 아직 월북하지 않았던 문인들과 함께 북으로 돌아갔다. 1960년대 중반에 숙청 또는 이직되었다는 설이 있을 뿐 다른 남한 출신 문인들처럼 1954년 이후의 행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카프라든가 최소한 동반자 작가로서 현실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가졌던 문인들은 더욱 그랬지만, 이태준이나 박태원의 경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순수문학이나 모더니즘 계열 작가들도 해방 이후 나름대로의 자책과 부담을 지니고 있었다. 아서원 봉황각의 공개적 자아비판 대담에서도 그런 흔적이 역력하게 보이는데, 일단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수렴되면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당시의 시대적 추세였던 좌파적 입장에 서게 된다. 당시에는 이런 선택이 생명을 위협 받을 정도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줄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1948년 남북 단정 수립 후에 닥친 탄압으로 전향하고 보도연맹에 엮인 것마저 전쟁이 발발하자 적색분자의 낙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월북 문인 대부분이 이런 정치적 변화에 의하여 북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는 하여도 해방 직후 많은 문인들은 ‘작가적 양심’에 따라 자신의 내면에 지닌 지식분자로서의 ‘소시민성’을 극복하고 조선의 민중과 더불어 새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겠다는 순수한 열정에 자신을 내던질 결심을 했다. 안회남의 경우도 식민지 사회에서 몰락해간 지식인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소외되고 밀려난 주변의 수많은 인물들에게 소설을 통하여 깊은 관심을 표현했다. 이는 소극적이기는 했으나 진실한 애정과 연민을 지닌 것이었다. 그랬던 안회남이 탄광에서의 징용 체험을 통하여 비로소 역사 또는 시대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해방되어 작가로 돌아왔을 때 과거의 자유주의적 프티부르주아가 아니라 가장 고통 받는 민중이 조선의 주인이며 그들과 함께 가겠다는 결의가 이후 변화된 작품의 도처에 단단하게 자리잡게 된다.

그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에 발표한 ‘불’은 문학가동맹 기관지인 ‘문학’ 창간호에 실렸다. 이 시기에 징용 체험을 토대로 쓴 외자 제목의 ‘쌀’ ‘소’ ‘말’ ‘별’ 등 같은 계열의 작품 중 하나다. 1947년 ‘문학평론’지에 ‘폭풍의 역사’를 발표했고 1948년 ‘문학’지에 중편소설 ‘농민의 비애’를 차례로 발표한다. 이들 모두를 안회남의 ‘해방 연작’으로 연이어 읽으면 당시 조선 백성의 삶의 결이 투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폭풍의 역사’는 1946년 일어난 ‘10월 항쟁’을 주제로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해방 이후 남한의 지방 도처에서 진행된 일제잔재 청산의 좌절과 구식민지 시대로 되돌아가는 미군정 치하의 농촌 피폐화 과정이 보편적인 밀도로 그려져 있다. 읍내 토호 세력들이 해방된 농촌에서도 척결되지 않고 예전보다 더욱 막강한 권력자로 자리잡아 가는 과정을 보면서 마을의 지식인인 주인공은 항쟁의 외곽에서 어쩔 수 없이 휩쓸려 가게 된다. 그는 단순하지만 순수한 열정을 가진 돌쇠의 죽음을 보고 언제나 사태의 제3자로 어정쩡하게 중립에 섰던 자신의 기회주의적 나약함을 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비와 바람에 찢겨진 성명서를 볼 때처럼 이 작품에서 당대의 흔적을 느끼면서도, 이른바 정서의 뿌리를 건드리는 문학적 감동은 느끼지 못한다.

‘농민의 비애’는 미군정의 미곡수집령으로 일제시대의 공출제도가 되살아난 농촌의 굶주림과 여전히 농민의 생살여탈을 쥔 지주의 횡포를 더욱 절망적으로 묘사한다. 주인공 서대응은 ‘굴종과 체념과 기아로 뭉쳐진 농민의 전형’으로 등장하는데 이 부분이 당대의 일반적인 농민과 가깝다. 이러한 서대응이 현실을 뛰어넘는 방법은 노루의 환상적인 모습을 통한 서정적인 초월이다. 눈 쌓인 산에서 뛰어다니는 노루는 서대응을 비롯한 농민의 자유를 향한 이상의 투영물로 나타난다. 농민이 농민임으로 해서 지닐 수밖에 없는 현실의 비참함을 시적 초월 이외에는 어떠한 희망도 지니지 못한 채 죽어간 서대응의 일생을 통해서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불’은 그야말로 잘 빠졌으면서 안회남의 체험과 정직한 진정성이 어우러진 명품이라고 할 만하다. 소설가인 화자는 정월대보름에 이웃의 이서방을 만나 그의 과거사를 듣는다. 일본 보국대에 끌려갔다 돌아온 이서방은 그동안 외아들을 천연두로 잃고 아내마저 이웃 홀아버지에게 개가해 빈털터리 신세다. 그는 불놀이를 보면서 전쟁터를 떠올리고, 해방감과 함께 ‘그동안 밉고 미운 일본을 위해 힘을 썼던 것이 부끄러운 만큼 무엇으로든지 앞으로는 조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불놀이라는 민속놀이가 부정함을 태워 새봄의 싹을 맞이하는 것처럼 봉건잔재를 불사르고 새로운 삶을 탄생시킬 정화의 제의가 되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인생에서 변화의 전기는 오지만, 운명과 시간이 맞아떨어지지 않거나 스스로의 미흡함 때문에 좌절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랴, 예술가는 그걸 알면서도 허공을 그러쥐고 대상과 함께 스러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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