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윤후명 - 그대 어디에 있는가

2012.07.01 21:29 입력 2012.07.01 22:34 수정
윤후명 | 소설가

우리가 헤어진 지 몇 해가 되었는지 모르오. 아니, 형이 살았는지 혹은 어떤지도 나는 모르오. 그 몇 해 전 전화로 가늘게 들려오던 목소리. 떳떳하게 내게 모습을 나타낼 수 있을 때, 그때를 기다려달라고 하던 목소리.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저 인생이란 것에 탄식을 보낼 뿐이오. 더군다나 엊그제 수인선 열차가 다시 개통된다는 뉴스를 듣자 지난 일들이 와락 달려들어 나를 우리의 그 공간과 시간 속으로 데려가는 것이었소. 새로 개통된 수인선이 비록 여느 열차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협궤열차이기 때문이오. 협궤열차가 바라보이고 기적소리가 들리는 공간이 우리의 독립된 왕국이었지요. 그곳에서 우리의 만남이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그 시절이 그립소. 형이 내게 들려준 인용구 ‘눈물은 시간을 적시지만 시간은 눈물을 마르게 한다’를 늘 잊지 않고 있었으니, 이제 그 말을 형에게 되돌려줘도 좋겠다 싶은 심정인 것이오.

[내 인생 마지막 편지](19) 윤후명 - 그대 어디에 있는가

산과 호수와 바다가 어울려 있는 그곳은 서울 변두리 땅으로서 우리나라 문화의 한 축도를 이루고 있었지요. 모든 밥벌이가 서울에 있던 그 무렵 우리는 몸부림치며 서울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몇 푼 챙겨서 돌아와 양식을 마련한 다음, 버려진 논밭, 버려진 웅덩이, 버려진 모래언덕을 거쳐 마지막 포구로 가곤 했소. 온통 죽은 듯한 잿빛 포구의 갯고랑을 타고 바닷물이 들이차오고 마침내 깃발을 꽂은 통통배들이 숨을 고르며 들어오는 것이오. 오젓거리 육젓거리 새우들이 염전의 소금더미처럼 쌓이면 망둥이 서대 장대에 상괭이 시육지도 미끈거렸지요.

문화의 축도라는 건 먹고살기에 팍팍했던 1980년대식 삶을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시달리면서도 오로지 문학을 향한 일념만으로 삶을 버티어 나갔습니다. ‘고원에 달이 떴다’는 동료 소설가의 문장을 반추하며 먼 꿈을 가까이 끌어당기던 날은 포장마차의 술잔에도 꿈이 찰랑거렸지요. 그러면 문학은 꿈을 현실과 맞바꾸는 힘이 되었지요.

‘무엇이든 일단 보았다면 작가에게는 자료’라며 형은 내게 많은 지혜를 가르쳐주었소. 외국문학 공부로 앞선 안목과 절도 있는 자세는 나 같은 어중된 인간에게는 늘 귀감이 되었소. 하물며 낚시미끼 꿰는 손길조차 섬세하여 나는 형이 눈치채지 않게 훔쳐보기를 즐기곤 했지요. 그 움직임이야말로 형이 말하던 ‘프랑스 섬세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그러니, 그 겨울 내가 아무 연락도 없이 프랑스 파리의 신근수네 호텔에 도착했을 때 보졸레 누보를 마시고 있던 형을 만난 뜻밖의 조우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지만, 그러나 어찌하여 우리는 조금씩 제각기 다른 운명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단 말이오. 중국이 홍콩을 접수했다고, 세기의 큰 사건이라고, 그걸 글로 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형은 홍콩으로 필리핀으로 유랑의 길을 떠나고 말았으니… 생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차라리 작은 액자에 불과함을 절감하오. 그곳에서 생계수단으로 삼았다는 형의 기타 연주 솜씨가 원망스러운 것이오. 거기에 흐르는 선율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은 이제는 지나간 우정의 편린 아닌 역린이 되고 말았소.

그곳에서 잠깐 돌아온 형이 내게 보여준 필리핀 원주민의 ‘타갈로그어 사전’처럼 이제 나는 형에 대한 모든 것이 낯선 까막눈이오. 형이 모습을 감춘 이 나라에서 나는 무엇인가 여전히 글자들을 짜맞추고 있소만, 형이 내 퍼즐을 해독해주지 않는 한 나는 내 글에 역시 까막눈이 될 것만 같소.

형이여, 그대는 어디에 살아 있기라도 하단 말이오? 여러 벗들이 가고 만 이제 허우적거리며 묻노니, 그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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