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오페라 ‘수궁가’

2012.09.05 21:36
문학수 선임기자

창극에 대한 고정관념 깼지만 ‘천지창조’ 장면은 논쟁거리

바그너의 음악극을 연상시키는 첫 장면이다. 짙푸른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명창 안숙선이 3m 높이의 사다리를 탔다. 관객에게는 3m가 넘는 긴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만, 치맛속은 그저 사다리일 뿐이다. 그 모양새가 마치 거대한 대모신(大母神) 같다. 객석에서 바라보면 위용이 당당하지만, 창자(唱者)의 입장에서는 몸의 균형을 잡기가 아슬아슬하다. 안 명창은 그 위태로운 사다리 위에서 천지창조를 묘사하는 서창(敍唱)을 판소리로 부른다. “천지가 탄생할 제, 어둠장막 깜깜한데, 현묘한 도, 밝은 빛 한줄기, 음양양분, 한서유강, 강약건습….”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이 ‘판소리 오페라’로 명명한 <수궁가>를 5일 무대에 올렸다. ‘창극’의 전망을 세계로 확대하겠다는 의도를 지닌 공연이다. 적잖은 제작비를 들여 지난해 9월 초연했으나, 공연기간이 단지 나흘에 그쳐 아쉬움이 컸던 작품이다. 동독 출신의 거장 아힘 프라이어(78)가 연출한 이 공연은 지난해 12월 독일 부퍼탈 시어터에서도 공연돼 현지 언론들로부터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국립극장 제공

국립극장 제공

첫 장면부터 논쟁적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 하나인 <수궁가>에 ‘천지창조’를 묘사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다. 연출가의 아이디어로 보이는 이 장면은 ‘판소리’라는 외피를 입었음에도 지극히 서구적으로 느껴진다. 하늘과 땅이 둘로 나뉘고 갖가지 만물이 태어난 후, 마침내 세상의 주인이 될 ‘인간의 탄생’이 이어진다. “남녀 생겨 어여뻐라. 걸음걸음 아름아름, 매무새 조신조신, 제몸처럼 아껴쓰고 사랑만 가득할 제 주먹 호령 없었으니, 곱고 정한 우리 인간 만물 중에 으뜸이라.”

판소리 오페라 <수궁가>는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창극’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다. 우리의 전통 서사에 서구의 미학과 세계관이 결합하면서, 시장을 국제적으로 확대할 개연성이 커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의 눈에는 ‘이게 뭐지?’라는 의아함의 가능성도 커졌다. 그런 맥락에서 이 공연을 따라가노라면, 토끼가 용궁으로 잡혀온 2부 첫 장면에 등장하는 긴 테이블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시킨다.

물론 <수궁가>의 무대는 ‘서구적’으로 아름답다. 추상표현주의풍의 간결한 회화 작품이 무대 뒷면을 장식하고, 한복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변형시킨 캐릭터들의 의상은 화려하고 다채롭다. 거기에 강렬한 콘트라스트의 조명으로 관객들의 시선을 단단히 잡아끈다. 그동안 약 150편의 작품을 만들어낸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의 다른 작품들, 예컨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나 한국 출신의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또는 그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 등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수궁가>의 무대가 그다지 낯설지 않게 느껴질 가능성이 크다. 그는 ‘판소리의 원형’을 강조하면서 전자적 음향을 자제하고 창자들의 음색 등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지만, 일관되게 구사해온 현대적 표현주의의 강렬한 느낌을 <수궁가>에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국립창극단이 세계적 연출가들에게 판소리 다섯 바탕의 창극 연출을 의뢰, 세계인이 공감하는 공연을 만들어보겠다는 ‘세계 거장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찬반 양론이 선명하게 갈릴 수 있는 논쟁적인 작품이다. 한데 아쉽게도 이 ‘판소리 오페라’에 대한 비평적 논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공연은 오는 8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펼쳐진다.

추천기사

바로가기 링크 설명

화제의 추천 정보

    오늘의 인기 정보

      추천 이슈

      이 시각 포토 정보

      내 뉴스플리에 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