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달빛 속으로 가다’

2012.09.26 21:13 입력 2012.09.26 23:49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느리지만 지루할 틈이 없네… 12년 전 초연 대본과 똑같아

이 연극의 시종(始終)을 이끄는 표상은 ‘달빛’이다. 달빛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희미한 빛을 뿌리면서 상처 입은 영혼들을 감싼다.

<달빛 속으로 가다>는 12년 전 대학로에서 초연됐던 연극이다. 당시의 정부가 실시한 ‘새로운 예술의 해 희곡 공모’에 당선됐던 극작가 장성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초연 연출가였던 김철리가 서울시극단의 하반기 정기공연으로 다시 꺼내들었다. 빠르고 유쾌한 연극이 유행하는 시대에 왜 이처럼 ‘느리고 답답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려는 것일까? 연출가는 “정치와 이념 과잉의 시대에 인간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뜻”이라고 했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으면서 숱한 모순과 갈등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1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을뿐더러, 외려 사람들의 삶이 더 망가졌다는 생각”에 다시금 대본을 집어들었다는 얘기다.

서울시극단 제공

서울시극단 제공

무대는 깊은 산속의 암자다. 음력 칠월 보름, 그러니까 백중 전야의 저녁 어스름 녘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둘씩 암자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모두 8명의 배우들이 등장한다. 환갑을 넘긴 엄보살은 암자의 살림을 맡고 있는 공양주 보살이다. 고시 준비를 하다 정신이 살짝 돌아버린 30대 중반의 ‘관식’은 엄보살을 마치 엄마처럼 따르며 암자에서 기거한다. 가장 먼저 중년 사내가 시체를 지게에 진 채 암자를 찾아오고, 이어서 늙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제를 지내러 온다. 산에서 솔잎을 따다가 발을 삔 의사, 그를 부축하고 나타난 의문의 중년 남자, 어머니 제사를 지내러 온 젊은 처녀 등이 차례로 암자를 찾아든다.

공교롭게도 모두 망가진 인생들이다. 예컨대 이념서적을 내는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빚에 쫓겨 산으로 도피한 사내, 북에서 내려온 사내와 재혼했다가 남편이 자살하는 바람에 다시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미망인, 오래전 행방불명된 자식이 여전히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늙은 어머니 등이다. 그들이 달빛 아래에서 털어놓는 푸념들은 마치 ‘고즈넉한 제의’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때로는 격렬하게 가슴을 뜯는 통한의 몸부림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 장성희가 그 숱한 사연들 속에 감춰둔 것은 이른바 ‘의문사’다. 극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의문사’라는 해괴한 명칭을 얻어야 했던 ‘정치적 타살’ 한 편이 마침내 무대 전면에 떠오른다. 하지만 장성희는 그 첨예한 사건마저도 달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제의 속으로 녹여내면서 ‘연극적 긴장’이라는 끈을 놓지 않는다.

어떤 관객들에게는 ‘그 죽음을 기억하라’는 연극의 내재적 메시지가 희미할 수도 있겠다. 아마 연출가 김철리도 그 점을 우려했는지, 우리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들을 무대 뒤쪽의 영상으로 처리해 ‘사회적 기억’을 상기시킨다. 그는 12년 전에도 그랬듯이 대본을 거의 상처내지 않고 무대에 올려 작가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내고 있다. 무대에서 펼쳐지는 갖가지 디테일을 생생하게 살려내면서,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연극에 힘을 불어넣으려는 태도가 여실하다. 막이 내려간 뒤에도, 지상의 모든 것을 응시하고 끌어안는 달빛의 이미지가 오래도록 뇌리에 남는 연극이다. 10월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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