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연주회

2012.11.07 21:02 입력 2012.11.07 21:47 수정
문학수 선임기자

힘찬 손열음의 피아노, 인상 깊은 게르기예프

피아니스트 손열음(26)은 이날 연주회의 꽃이었다. 지난 6일 저녁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로 불리는 발레리 게르기예프(59)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의 내한 연주회가 막을 올렸다. 게르기예프는 지난 2월에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한 바가 있으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 함께 내한하는 것은 2005년에 이어 7년 만이다.

손열음은 1부의 두번째 순서, 오케스트라가 첫 곡인 리아도프의 ‘바바야가’로 몸을 푼 직후에 무대에 등장했다. 연주곡은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손열음은 강하고 빠른 서주의 두 마디에서부터 산뜻한 출발을 선보였다. 협주곡에서 솔리스트의 첫걸음은 이후의 연주를 가늠하는 잣대일 터. 첫발에서 호흡을 놓치면 이어지는 연주에서도 갈지자 횡보를 보이는 경우가 다반사다. 하지만 손열음은 첫번째 타건에서부터 듣는 이를 충분히 안심시켰다. 이어지는 저현(低絃)의 피치카토, 다시 손열음의 피아노가 서정적인 선율을 한 차례 노래한 다음 현악기가 화답했다. 누가 보더라도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러시아의 차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게르기예프, 게다가 그의 사단(私團)이나 진배없는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솔리스트에게 적잖은 부담을 안길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손열음의 연주는 시종일관 침착하고 당당했다. 빠른 손놀림은 물론이거니와 느리고 서정적인 악구에서도, 화려하고 매끄러운 옥타브에서도 시종일관 흔들림 없이 음악을 끌어갔다. 특히 4악장에서 보여준 힘찬 트레몰로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이었다. 마지막 악구에서 손열음이 펼친 퍼포먼스적 마무리도 인상적이었다.

6일 예술의전당에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마친 피아니스트 손열음(앞줄 가운데)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6일 예술의전당에서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마친 피아니스트 손열음(앞줄 가운데)이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손을 잡고 인사하고 있다. 마스트미디어 제공

연주회 직전으로 시곗바늘을 잠시 돌려보자. 사실 황당한 상황이었다. 약속된 리허설 예정시간은 오후 5시였으나 ‘지각대장’으로 소문난 게르기예프가 한 시간이나 늦게 ‘헐헐’ 웃으며 나타났다. 결국 협연자 리허설은 오후 7시10분부터 시작됐다. 연주회 막이 오르는 시각이 오후 8시였으니, 협연자 손열음이 오케스트라와 손발을 맞춘 시간은 고작 10여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날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 1번’은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음악적 그릇’이 몇해 전과 비교해 확연히 커졌음을 보여줬다. 오케스트라와의 리허설이 그토록 부족했음에도, 손열음은 일체의 감정적인 동요 없이 무대를 장악했다. 그가 홀로 보낸 고된 연습의 나날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부분이다.

아울러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공부하는 피아니스트’의 모습이었다. 연주의 처음부터 끝까지, 손열음은 악보의 행간을 읽어내면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적 의도와 뉘앙스에 깊숙이 접근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줬다. 덕분에 그가 들려준 음악은 풍부한 표정을 드러내면서 청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선곡이 아님에도, 이날 연주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연주회는 오후 11시가 돼서야 막을 내렸다.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오케스트라는 리아도프의 ‘바바야가’로 워밍업을 마친 후,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 1번’과 ‘교향곡 15번’을 거쳐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까지 밀어붙이는 ‘푸짐한 상차림’을 내놨다. 게르기예프는 역시 손이 큰 모양이다. 자신들의 본거지인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도 3시간 넘는 연주회를 일상적으로 펼치는 그들은 서울에서도 역시 ‘괴력’을 보여줬다.

게르기예프는 지휘대를 아예 치우고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무대 바닥에서 지휘했다. 덕분에 그는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특유의 지휘폼을 선보였다. 특히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을 연주할 때, 게르기예프는 연기를 펼치는 한 명의 배우와 같았다. 물론 이번에도 그는 이쑤시개만한 지휘봉을 들었고, 손가락을 자주 부들부들 떨면서 단원들을 압박했다. 때로는 손목을 탁탁 꺾는 특이한 동작을 선보이기도 했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에서 지휘자의 그런 모습에 주목하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이다. 마리스 얀손스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보우가 눈빛을 교환하면서 연주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장면이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와 차이코프스키 교향곡이 비교적 호연(好演)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겠다. 금관 파트가 종종 불안한 음정으로 목 쉰 소리를 낸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손열음과 게르기예프는 12월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도 협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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