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개인민주주의 여파 ‘정치의 고객’이 된 미국시민…한국도 다르지 않다

2013.02.01 19:32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매튜 A 크렌슨,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서복경 옮김 |후마니타스 | 524쪽 | 2만3000원

“일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무엇보다 쇼핑을 하십시오.” 9·11 테러 직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필요없으니 경제나 부양하면서 방해하지 않고 얌전히 있으라”고 말한 셈이다.

아마 100년 전이었다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졌을 테다.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로 급박했다면 “젊은이들은 모병소로, 여성들은 군수공장으로 와 달라”고 호소했을지 모른다. 정당과 정치엘리트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평범한 시민들에게 입법과 정책과 예산의 보상을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다양한 정치활동에 참여를 이끌어내는 ‘정치동원’을 중요시했다. 이른바 ‘대중민주주의’다.

[책과 삶]개인민주주의 여파 ‘정치의 고객’이 된 미국시민…한국도 다르지 않다

우리 시대의 정부는 더 이상 시민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날 서구 국가들은 “평범한 시민들의 참여 없이도 군대를 모으고 세금을 걷고 정책을 집행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정치엘리트들은 유권자 대중을 주변화했고, 점차 법원과 관료들에 의존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다. 저자들은 이런 경향을 대중민주주의와 구분해 ‘개인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개인’이란 말이 암시하듯 대중은 ‘사적 시민들의 집합’으로 해체됐다.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은 ‘집단적인 것’이라기보다 ‘개인적인 것’이 돼 가고 있다. 워싱턴 정가에서 미국인들은 이제 ‘시민’이라기보다 ‘고객’이라고 불린다. 과거 시민들은 정부를 ‘소유’했으나 이제 정부로부터 ‘서비스’를 받는 존재일 뿐이다.

19세기 미국은 백인 남성 보통선거권을 최초로 도입했으며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 유권자의 70~80%를 동원해내는 역동적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2000년 대통령 선거는 “고작 유권자의 절반 정도만 투표하고, 득표 집계는 무엇 하나 분명하지 않은 채 승패가 사법부의 판결로 가름되는 선거”가 됐다. 당시 박빙의 선거는 사실상 플로리다주의 선거결과에 의해 결정될 운명이었는데, 주법원의 재검표 결정을 연방대법원이 파기함으로써 법원이 사실상 부시의 당선을 도운 꼴이 됐다. 그럼에도 패배한 앨 고어는 “이 문제에서 여론은 중요하지 않다. 법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치학자들은 정치엘리트 간 경쟁과 갈등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대중의 정치참여도 증가할 것이라고 봤다. 그런 이론이 무색하게도 현대 정치에서는 대중은 사라졌는데 엘리트 간의 갈등은 격화되고 있다. 유권자들 또한 정치참여보다는 개인 수준의 봉사활동 같은 실천에서 만족감을 찾는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페미니즘의 금언은 ‘정치적인 것은 개인적인 것’이라는 말로 변형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 투표를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해 11월 미국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의 시민들이 대통령 선거 투표를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런 현상은 “가족이 붕괴됐거나, 텔레비전으로 인해 시민사회가 쇠퇴됐기 때문”은 아니다. 저자들은 “상당 부분 국가 구조의 변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말한다. “정치 공동체가 좋은 시민을 고무할 수 있는 유인”을 제공해야 함에도 오히려 그 반대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다. 과거 정부가 시민들의 동원에 큰 힘을 기울였던 것은 정부재정과 국토방위가 시민들의 참여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 없이 납세 없다’는 슬로건이 호응을 얻었고, 보편적 군역은 보통 선거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요즘 세금은 임금에서 원천징수되거나 금융거래 정보 검사를 통해 이뤄진다. 수백만 시민들로부터 납세 의지와 무관하게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군대도 단기 징집병보다는 고도로 훈련된 직업군인이 선호된다.

이제 국회 주변에는 소위 전문가들과 각종 단체 대표들만 붐빈다. 정당과 정치 엘리트들은 평범한 시민들이 뭘 원하는지를 직접 묻기보다 전문가와 대표자들에게 묻는다. 정당도 동원을 포기했고 혼자서는 ‘자발적 참여’가 불가능한 시민들은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환경, 소비자 보호, 인권 등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굳이 대중을 동원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기보다 전문가를 통한 공익소송과 광고, 캠페인에 주력한다. 이런 공익소송의 남발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가 사법의 영역에서 결정되는 모순을 낳는다.

이제 민주주의의 과정은 고도로 ‘다운사이징’됐다. 시민들은 여론조사 과정을 통해 대표되는 ‘가상적 존재’로만 남았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행동하는 양심’ ‘깨어있는 시민’들이 강조되지만, 그 이면에 동원되지 않으면 참여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의 모습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됐다. ‘촛불집회’처럼 폭발적인 대중행동의 가능성은 여전히 있지만, 그 유효기간은 대개 짧다. 저자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가장 절박하고도 우려스러운 문제는 ‘알게 뭐야?’가 될 수도 있다”고 책을 끝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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