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안녕 피아노’

2013.08.21 22:00
문학수 선임기자

소설 한 편을 읽은 듯 가슴 흔드는 ‘순수의 몰락’

오랜만에 만나는 향기 나는 희곡이다. 물론 그 향기는 ‘정통 문학의 향기’다. 극중의 대사는 잘 쓴 소설 속 문장들처럼 정갈하고 적확하다. 지문은 간결하고 시적이다. 요즘 대학로 연극들이 너무 시끄럽다거나, 극의 전개 속도가 매우 빨라 적응이 잘 안된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안녕 피아노>가 공연되는 노을소극장으로 향하는 게 좋겠다. 약 80분간의 공연이 끝난 후, 어쩌면 박완서나 오정희의 중편소설 한 편을 읽은 듯한 감회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극의 배경은 지방의 작은 도시 K시. 몰락한 서울의 어느 중산층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온다. 중심가를 벗어난 한적한 위치에 자리 잡은 ‘피아노 모텔’이 연극의 무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텔 관리인으로 일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리게 되는데, 모텔의 가장 전망 좋은 방에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딸 미정의 피아노다.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져온 그것이 모텔의 방 하나를 차지한 채,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오브제로 작동한다.

[객석에서]연극 ‘안녕 피아노’

연극은 일단 딸의 시점으로 상황을 관찰한다. 그녀의 눈에 비친 모텔은 추악하다. “잠깐 쉬었다 가겠다”는 남녀들이 쉼없이 찾아오고, 현실에서 무기력한 아버지는 ‘러브 모텔’이 아니라 ‘순수한 모텔’임을 누누이 강조하며 잘난 체하지만, 결국 세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속물성을 드러낼 뿐이다. 그 아버지는 잠깐의 사랑을 나누기 위해 찾아온 커플들에게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떠벌리고 딸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고 은근히 자랑한다. 그래서 ‘피아노가 있는 방’은 다른 방들보다 대실료도 비싸다.

연극 속의 피아노는 순수함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느 날 찾아온 커플이 피아노 위에서 한바탕 섹스를 펼치는 장면은 ‘피아노에 대한 능욕’이다. 미정은 남녀의 육욕으로 더러워진 피아노의 건반을 거칠게 두들겨대며 “너를 죽여버리겠다”고 몸부림친다. 연극에는 그렇게 추악한 현실과 무너지는 순수를 결벽적 시각으로 대비시키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한다.

<안녕 피아노>는 한 20대 초반 여성의 아픈 성장기처럼 보인다. 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이뤄낼 수 없는 현실, 폭력과 허위로 가득한 아버지와의 갈등, 사랑했던 피아노와의 이별, 어느날 모텔을 찾아온 ‘나그네’와의 추억 같은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교직된다. 실제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작가 겸 연출가 최명숙이 쓰고 연출한 무대. 연극의 제목인 <안녕 피아노>는 베토벤의 곡으로 알려진 ‘피아노여 안녕’에서 빌려왔다. 연극에서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0번의 아다지오 악장, 바흐의 ‘시칠리아’, 쇼팽의 ‘발라드’ 등 주옥 같은 피아노 선율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천정하, 김용준, 이승연, 송준혁, 박근형, 최유진 출연. 공연은 9월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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