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대법관

2014.12.10 22:12 입력 2014.12.10 22:36 수정

미국에서 대법관은 누구보다 근엄하고, 범접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대통령의 동선은 공개돼도 대법관은 공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젊은이들 사이에 유머의 소재가 되며 인기를 얻는 대법관이 있다. 81세로 현역 최고령인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이다.

긴스버그는 이름 이니셜을 따서 ‘악명높은(Notorious) R.B.G.’로 통한다. 1년 전 그를 흠모한 뉴욕의 여성 법학도가 작고한 흑인 남성 래퍼 ‘노토리어스 B.I.G.’에서 따온 이름이다. 같은 이름으로 소셜미디어 텀블러에 블로그도 만들어졌다. 텀블러 이용자들은 굵은 뿔테를 쓴 긴스버그의 얼굴에 왕관을 씌운 사진을 올리는가 하면, 그의 얼굴을 새긴 티셔츠도 만들었다. 티셔츠는 지금까지 5000벌 이상 팔렸다고 한다. 긴스버그는 지난 10월 미국 공영방송 NPR의 대담에 나와 “그 티셔츠를 엄청나게 갖고 있다”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내 손주들이 그 패러디를 무척 좋아하고, 나도 요즘 시대에 따라가고자 텀블러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상은 여성의 낙태권, 동성결혼 등 미국 사회를 가르는 이슈에서 소수자 중시 판결을 내는 긴스버그가 젊은 세대의 진보적인 성향과 맞아떨어진 데 따른 측면이 있다. 동성결혼식 주례를 서기도 했다. 최근 심장혈관에 스텐트를 꽂는 수술을 하고 닷새 만에 법복을 입고 출근한 일이 알려져 또다시 소셜미디어상의 영웅이 됐다. 그의 대척점에는 남성 대법관으로 보수적 성향의 판결을 하는 안토닌 스칼리아(78)가 있다. 29년째 대법관을 하고 있는 스칼리아는 긴스버그만큼 많은 젊은 팬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지만, 진영 논리를 넘어서는 두 사람의 우정을 소재로 한 오페라가 내년 여름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미국 대법관은 죽을 때까지 자리를 보전한다. 그래서 이들처럼 고령인 경우가 대다수다. 선출직이 아닌 데다 판결의 불투명한 절차 때문에 ‘가장 많은 권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장 책임을 덜 지는’ 자리란 비판을 받는다. 끝없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려는 이들의 노력과 무엇보다 이들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게 만든 소셜미디어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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