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의 ‘뜨개질, 그 후’

2015.09.20 21:19 입력 2015.09.20 21:24 수정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그리하여 커가는 아이의 치수에
맞춰 얼마나 많은 기다림을 짜고
풀어내고 짜고 풀어내고 하였던가

세월이 흘러도 그 집은 오래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
언젠가 나도 그 앞을 지나가다 불빛에 들킨 적 있다
거기 문밖에 누가 와서 울고 있니?
희망이냐, 희망이냐

불빛은 미동도 없이
고요히 타오르고 있었다
뜨개질은 멈출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때의 그 나지막한 읊조림을 무어라 할까
창문의 그 꺼지지 않고 옹송그리는 그림자를
세상의 모든 여자들의 입술을 지나가는 그들의 노래를


공장에서 니트 원단을 공업용 재봉틀로 박으면 수천벌 니트 제품이 단숨에 쏟아지는데, 이런 세상에 한 코 한 코 느리게 손뜨개질하는 사람이 있답니다.

[경향시선] 송찬호의 ‘뜨개질, 그 후’

뜨개질은 너무 느려서 코바늘이 한 코, 한 코, 씨실과 날실을 엮는 동안은 그 실이 무엇이 될지 보이지 않는답니다. 모자나 장갑, 목도리나 스웨터는 상상 속에 있지요. 뜨개질하는 동안 연인은 상상 속에서 그 목도리를 수백번 둘러볼 것이고 자식은 스웨터를 수천번 입어 보겠지요. 느릴수록 그 즐거움은 더 길어진답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은 제동이 걸리고 제 리듬이 회복되겠죠. 그러는 사이 뜨개질하는 여자들의 노심초사와 전전반측과 언제 닥칠지 모르는 비극과 꿰매도 너덜너덜한 마음과 날뛰는 심장은 느린 시간 속으로 들어가 편안한 리듬을 회복하겠지요.

달은 늘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올려다보면 어느새 훌쩍 가 있지요. 뜨개질도 늘 제자리인 것 같지만 한참 있다 보면 조금씩 자라 있지요. 기억도 사랑도 아픔도 슬픔도 겉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안으로는 열심히 움직인답니다. 내면의 상처도 그대로인 것 같지만 쉬지 않고 아무는 중이지요.

한 해에 가장 아름다운 보름달을 보며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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