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콧 보고서’ 발표 후폭풍
“너무나 확실한 보고서에 따라 토니 블레어는 헤이그 전범재판소에 보내져야 한다.” 2003년 영국이 이라크 전쟁 참전을 결정하는 과정의 진상을 조사한 ‘칠콧 보고서’가 발표된 지난 6일. 영국군으로 참전했다 전사한 병사의 어머니 발레리 오닐은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서도 블레어 전 총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전쟁은 끝났지만, 잘못된 정보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실패한 전쟁에 군인들을 대거 내보낸 데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묻는 작업은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
칠콧 보고서는 이라크를 둘러싼 영국의 ‘진실찾기’ 노력을 집대성한 것이자, 정부의 잘못된 정책은 반드시 엄정하게 평가한다는 철학과 신념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2003년 이라크전이 시작된 직후부터 이미 영국에서는 참전 결정을 놓고 의혹이 제기됐다. 공영 BBC가 정부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정보 문건을 왜곡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방송 후 취재원으로 지목된 인물이 의문의 자살을 하자 블레어 측이 개입했는지를 놓고 청문회가 열리기도 했다.
그 후에도 BBC는 이라크전 관련 보도를 계속했다. 블레어는 2007년 퇴임하면서 “언론은 사람과 명성을 갈가리 찢어버리는 포악한 야수와 같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공정성을 지키려 애쓴 언론이 아닌 블레어 자신이었다. 논란이 그치지 않자 2009년 6월 블레어의 후임인 고든 브라운 총리의 지시로 원로 행정가 존 칠콧이 이끄는 진상조사위원회가 설립됐다. 위원회는 7년에 걸쳐 정부문서 15만건을 분석하고 블레어를 포함해 120명의 증언을 들었다. 12권에 이르는 조사보고서의 결론은 블레어의 참전 결정이 총체적 오판이라는 것이었다.
이제 영국은 정보와 여론을 왜곡하고 잘못된 정책으로 결국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힌 국가지도자에게 어떤 식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블레어는 보고서 발표 후 기자회견을 열고 참전 판단이 착오였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당시로선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이라크전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 가족들의 눈을 쳐다보고 거짓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거짓말이나 속임수는 없었다”고 대답했다.
비판 여론은 높지만 법적 책임을 물을 방법은 마땅치 않다. 칠콧 보고서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전쟁범죄 혐의로 회부하기도 쉽지 않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등은 블레어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ICC에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ICC 협약에 가입하지도 않은 미국은 물론, 영국이 블레어를 국제법정에 내보낼 가능성도 낮다. ICC는 인종학살 등을 이유로 오로지 아프리카인들만 기소해왔다. 워싱턴포스트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ICC는 침략 문제는 조사하거나 기소하지 않는다”며 “이라크 침공은 검토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BBC에 따르면 보수당 데이비드 데이비스 하원의원은 오는 14일 블레어의 의회모독 여부를 묻는 안건을 발의할 계획이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도 블레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의회가 유죄로 결론짓는다 해도 국왕 자문기관인 추밀원 위원직을 빼앗기는 정도의 조치가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