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북한인권 문제에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5년 동안 공석이었던 북한인권국제협력대사를 임명했고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를 고려해 참여하지 않았던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 공동제안국에 다시 들어가는 것을 적극 검토 중이다. 지난 20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공개토의에서는 탈북 여성의 인권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추구하는 국정기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또 북한인권에 소극적이었던 전임 정부를 비판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북한인권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한 것은 옳은 일이다.
인권은 원래 진보세력의 어젠다이지만, 한국 사회의 북한인권은 그렇지 않다. ‘북한’과 ‘인권’이 결합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흘렀다. 북한인권이 국제적 이슈가 된 것은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1990년대 중반이다. 당시 남북화해라는 시대적 소명에 매진하고 있던 김대중 정부는 북한에 매우 예민한 문제인 인권에 말을 아꼈다. 북한과 화해·협력을 추진하고 개방된 사회로 이끌면 인권 개선이 따라올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국내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세력이 내세웠던 입장과는 맞지 않는 논리였다. 이 같은 흐름은 진보 정부인 노무현·문재인 정부에로 이어졌다. 남북협력과 평화정착이라는 대의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자유·인권·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진보가 북한인권을 소홀히 취급한 것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진보가 북한인권을 놓아버리자 보수세력이 이를 선점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탄압했던 과거 때문에 ‘인권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보수세력에는 좋은 정치적 호재였다. 북한인권을 보수가 주도하고 진보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기형적 구도는 이렇게 형성돼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보수세력이 북한인권 문제를 추동하고 사회적 이슈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 윤석열 정부가 북한인권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은 옳은 방향이며 긍정적이다. 하지만 진정성이 문제다. 보수세력이 순전히 북한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북한인권에 목소리를 높인 것은 아니다. 정치적 계산이 당연히 포함돼 있다. 북한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진보를 ‘종북’으로 몰아붙이고 정쟁의 도구로 활용하는 구태가 여전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인권에 진심’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과거 한국도 인권문제로 국제적 비난을 받는 나라였다.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기 시작한 것은 국제규범을 따르지 않으면 잃을 것이 너무 많은 나라가 됐을 때부터다. 인권을 개선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온 외교적 자산과 경제적 이익을 포기해야 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국제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북한에 국제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따르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인들 ‘잃을 것이 없는’ 북한이 변할 리 없다. 진정으로 북한인권 개선을 원한다면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고 혜택과 의무를 갖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북한인권에 균형적인 접근 없이 압박만을 가하면 북한의 주장대로 ‘체제를 압살하려는 국제적 모략’이 될 수밖에 없다.
자유롭고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사는 것이 인권의 전부는 아니다.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전쟁을 막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화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빈곤·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적 지원을 늘리는 것도 북한인권 증진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윤석열 정부는 염두에 둬야 한다. 인권은 상황에 따라 기준과 원칙이 바뀌어서는 안 되는 ‘보편적 가치’다. 북한인권에는 목소리를 높이면서 유엔인권보고서가 항상 지적하는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두고, 차별금지법에 반대해 사회적 약자의 권리 증진을 외면하는 것은 모순이다. 윤석열 정부가 북한인권에 대한 진정성을 인정받으려면 국내 인권문제에서도 달라진 태도를 보여야 한다. 야당 역시 북한인권이 남북 간의 정치적 문제 해결의 걸림돌이라는 인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또 북한인권은 북핵문제와 마찬가지로 국제사회와 연대하고 해결해 나가야 할 글로벌 과제임을 직시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쏘아올린 북한인권 정책이 국내에서 오랜 세월 동안 왜곡된 상태로 이어져온 북한인권에 대한 인식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또 북한인권이 정쟁을 위한 ‘도구로서의 인권’이 아닌 ‘인권 그 자체’로 다뤄지는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