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제3자 변제’는 실패작이다

2023.03.17 03:00 입력 2023.03.17 03:03 수정

한·일은 1965년 청구권협정에서 상호 청구권 문제를 최종적으로 완전히 해결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민관공동위원회를 만들어 당시의 기록을 검토한 뒤 일본군 위안부·원폭 피해자·사할린 동포 문제 등 3가지는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유신모 외교전문기자

강제징용이 제외된 것은 한국 정부도 이 문제가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2018년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정부 공식 입장과 배치되는 이 판결은 정부를 ‘완벽한 딜레마’에 빠뜨렸다. 대법원의 판결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지만, 국가 간 협정을 뒤엎을 수도 없다.

일본 기업에 배상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청구권협정의 분쟁 해결 절차인 중재위원회를 열지 않는 한 결국 ‘제3자 변제’가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다.

피해자들도 제3자 변제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는 국내적 지지를 받지 못한다. 제3자 변제를 추진하는 수순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제3자 변제는 대법원 판결을 우회하는 정치·외교적 해결이다. 따라서 이를 해법으로 제시하려면 여러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정부 입장과 다르고 국제적으로 지지받지 못하는 판결이라고 해도 피해자들은 정당하게 법적 권리를 갖게 됐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설득하지 않고는 제3자 변제가 성립될 수 없다. 판결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많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므로 이를 간과하면 안 된다. 국민적 이해를 구하기 위해 제3자 변제 공론화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 또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흔적이라도 남겨야 한다. 그리고 확정판결을 받은 15명 외에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입법 조치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야당과 협력해야 한다. 일본도 배상 여부를 떠나 강제징용 자체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윤석열 정부는 이 같은 전제조건을 하나도 채우지 않은 채 제3자 변제를 발표했다.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추진되었어야 할 난제들을 건너뛰고 제3자 변제를 먼저 강행한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나중에 채울 수 있으면 채우고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식이다.

이런 방식은 선후가 뒤바뀐 것이어서 문제 해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바둑판의 같은 곳에 돌이 놓이더라도 수순이 틀리면 묘수가 될 것이 자충수가 되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 국민 중 일본이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과 관계개선이 필요하다고 모든 사람이 말하는 이유는 갈등을 유지하는 것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번 결정의 주요 배경으로 ‘엄중한 국제정세’를 들었다. 강제징용 문제를 해결해 한·일 및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의 디딤돌로 삼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부 해법에 대한 반발이 너무 커 한·일 및 한·미·일 안보협력 확대를 추동할 국내 동력이 생기기 어려워 보인다. 국내적 지지가 없는 외교정책은 성공할 수 없다. 한·미·일 안보협력의 장애물을 서둘러 제거하려다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커졌다. 과연 해결이 된 것인지, 무엇 때문에 해결하려고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강제징용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해 왔다. 용기 있는 리더십은 어려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피해자 설득, 국민 동의, 야당과의 협치를 이뤄내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지 혼자 덜컥 일 저질러 놓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큰소리치는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매듭을 푸는 게 어렵다고 잘라서 못 쓰게 만들어 놓고 이걸 ‘대승적 결단’이라고 주장하니 난감할 뿐이다.

정부의 밀어붙이기로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한·일 정부 간 논란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국내적 혼란과 갈등은 이제 시작이다. 이 문제를 이렇게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정부의 이번 일방적 결정은 커다란 후과를 남길 것이다. 하지만 더욱 우려되는 것은 강제징용 해법 추진 과정과 3·1절 기념사, 외신 인터뷰·각종 대외발언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윤 대통령의 단순하고 균형감 없는 역사 인식이다. 재임 기간에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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