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장남의 제사 주재권’ 파기한 대법, 차별 없어지는 전기로

2023.05.11 20:38 입력 2023.05.11 20:39 수정

명절 차례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명절 차례상. 경향신문 자료사진

민법 1008조 ‘제사를 주재하는 자’와 관련해 장남에게 우선권을 준 판례가 15년 만에 파기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11일 유족 간 협의가 되지 않을 경우 부모의 장례나 제사 등은 아들딸 성별에 관계없이 연장자가 주재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달라진 시대상과 사회의 성평등 인식을 반영한 대법원의 판례 변경을 환영한다.

이번 소송은 혼외자를 둔 남성 A씨의 사망이 단초가 됐다. 1993년 결혼해 두 딸을 둔 A씨는 2006년 다른 여성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A씨 사망 후 혼외자가 이복 누이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고인의 유해를 납골당에 봉안했다. A씨 배우자와 딸들은 “고인의 유해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지만, 1·2심은 2008년 대법 판례를 근거로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날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장남·장손자 등 남성을 제사 주재자로 우선하는 것은 성별에 의한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정신과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제사 주재자는 공동상속인 간 협의에 의해 정하되,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피상속인의 직계비속 중 남녀, 적서를 불문하고 최근친의 연장자가 제사 주재자로 우선한다”고 밝혔다. 물론 ‘최근친 연장자’ 역시 절대적인 기준일 수는 없다. 망인의 의사와 망인이 생전에 유족과 형성한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따질 필요가 있다.

제사 주재권은 한국 사회 가부장적 관습의 핵심 중 하나다. 장남은 제사 주재권은 물론이고 부모의 유해와 분묘 등 제사용 재산 소유권도 갖는다. 관습을 뒷받침한 법적 근거는 1950년대 민법 제정 당시 명시된 호주 상속제다. 호주를 상속하는 사람이 제사도 상속했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됐지만 부모 유해를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장남에게 있었다. 그나마 2008년 차남이나 딸도 제사를 주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망인의 재산을 물려받는 공동상속인들끼리 협의해 제사 주재자를 정하라’는 새 기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파기된 판례다. 그러나 이때도 상속인들끼리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엔 장남이나 장손에게 제사 주재권을 줘야 한다고 했다.

주목할 점은 이번 대법원 판결이 2008년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김영란 대법관은 “다수의견이 지도적 원리로 삼고 있는 장자 우선의 원칙은 현대사회에서 합리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성별 및 연령을 기준으로 공동상속인들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이라며 “사회생활 및 제도의 변화에 역행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15년 전 소수의견이 이번 판례의 씨앗이 된 셈이다. 여성에게 차별적인 제도와 관행은 앞으로도 계속 폐지·수정돼야 한다. 성별 외에도 한국 사회엔 인종·나이·성적 지향·학력·고용형태 등에 따른 차별이 만연해 있다. 대법 판결이 이런 차별들을 모두 되돌아보고 허물어가는 전기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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