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크고 아름다운, 살찐 몸
“네덜란드를 배경으로 한 동화 중에 주먹으로 물이 새는 둑의 구멍을 막고 선 소년 얘기가 있거든요. 가끔 제가 그 소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안된다고요. 앞으로 한 발자국 나가는 게 안되면 반 발자국, 그것도 안되면 버티기라도 하자고 다짐하죠.”
김지양씨(38)에게선 뜻밖에도 너무 비장한 말이 흘러나왔다. 10년 넘게 몸 다양성 관련 활동을 해 온 원동력을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김지양’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수식어로 설명하기 어렵다. 데뷔 14년차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자 패션 잡지 ‘66100’ 편집장이자 동명의 의류 브랜드 대표이고, 세권의 책을 펴낸 작가이자 강연가, 외모 강박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임을 열고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2010년 당시 165㎝, 70㎏의 몸으로 미국 최대 플러스 사이즈 패션위크인 ‘풀 피겨드 패션위크’에서 한국인 최초로 데뷔했고, 4년 뒤 66100이라는 브랜드를 만들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크고 아름답다’는 슬로건을 내건 66100은 여성 사이즈 66, 남성 사이즈 100으로 정의되는 ‘표준’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의미다. ‘플러스 사이즈’라는 용어 자체가 기성복의 표준 치수보다 더 큰 치수라는 뜻이다. 김씨는 “예전엔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라고 하면 ‘그게 뭐야’ 했는데, 이제 그런 건 없다. 그게 10년 간의 수확이라면 수확”이라며 웃었다.
그의 활동은 단순히 자신의 몸을 당당히 드러내거나 의류를 만들어 파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별받거나 배제되기 쉬운 몸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고객이 원하는 스타일을 찾고, 그 스타일에 어울리는 옷을 제안하는 66100의 일대일 스타일 컨설팅은 그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방법이다.
“몸에 맞는 옷 입었다고 우는 사람들…어떤 몸이든 괜찮아”
김씨는 “티셔츠 한 벌 입고 우는 사람이 그렇게 많더라”고 말했다. “몸에 맞는 옷 하나 찾는 것조차 너무 어려웠던 거죠. 어떤 경험을 해왔는지 얘기하면서 우는 분들이 많았어요. 그러면 제가 얘기하죠. 울지마, 괜찮아. 그리고 울어, 괜찮아. 이렇게요.”
그가 심신이 지치고 소진돼 무기력에 빠지는 번아웃이 올 때까지 일하고, 파도처럼 몰아치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침잠하다가도 “쓸려나간 만큼 다시 모래를 퍼올려서 성을 쌓고” 살아가는 덴 이런 이유가 있다. 살찐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우는 게 싫어서, 김씨는 ‘내 몸’에서 ‘우리의 몸’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나갔다.
그는 섭식장애 지지모임과 ‘목요회’라는 이야기 모임을 정기적으로 열고, 외모 다양성 영화제인 ‘다다름 필름 파티’도 연다. 사진에 담기는 것에 자신이 없고 카메라 앞에서 떠는 사람들을 위한 세미나도 연다. 자신의 몸에서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김씨는 “내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좋아하는데, 그게 결국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더라”라고 했다.
“일대일 컨설팅에 예약하고 온 분이 1500명 넘고, <몸과 옷>이라는 인터뷰집을 쓸 때 89명을 만났어요. 거기다 유튜브에 출연한 영상이 100만뷰를 찍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저와 만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몸에 대해 생각이 바뀌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결국엔 외모지상주의가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덜 울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김씨에게 지금 자신의 몸은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고민하던 그는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다른 내용이 되는 서술형 답안지”라고 답했다.
“우리는 사람 하나하나의 몸을 잘못 채점된 시험지라고, 오답이라고 여기며 살아요. 근데 사람이 시험지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더 많은 몸에 대해서 얘기해야 해요. 이 몸도, 저 몸도 다 정답이라고요. 그때까지 제가 끝까지 있을 테니, 여러분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0년 넘게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활동해 온 김지양씨에게 몸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김씨의 이야기를 유튜브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