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 중반에는 일본 경제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개발연대기 한국의 성장모델이 일본을 따라잡기 위한 ‘캐치 업(catch up)’ 전략에 기반하고 있었던 데다 당시만 해도 일본이 꽤 괜찮은 경제모델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가전업체 조지루시가 만든 코끼리 밥솥이 한국 관광객들의 필수 구매 대상이 될 정도로 ‘일제(made in Japan)’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돌아보면 일본이 이후 걸어간 ‘잃어버린 30년’의 초입이었지만 말이다.
2000년대 들어서선 한국이 일본에 대해 가졌던 열등감은 거의 없어졌다. 새롭게 열리던 중국 시장에서 큰 기회를 잡으면서 한국 경제는 도약했다. 기업단위에서도 삼성전자는 소니를 따돌렸고, 현대차는 도요타에 비견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반면 일본 경제는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격 폭락이 수반된 장기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일본 경제의 위상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의 사례로 추락했다.
최근엔 다시 일본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주로 자본시장 영역에서 그런데, 작년부터 한국 개인투자자들의 일본 주식 순매수가 본격화되고 있고, 지난 2월 발표된 정부 주도의 주가 부양 프로그램인 ‘밸류업 방안’ 역시 일본의 사례를 참조해 만들어진 정책이다.
실물경제의 운영이건 자본시장이건, 일본 경제는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을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일본은행은 극단적으로 많은 유동성을 경제에 주입함과 동시에, 일본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적극적으로 매수하면서 재정지출 재원 확보에 도움을 줬다. 관치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로서 향후 일본 경제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일본은행 ‘통화정책 정상화’ 주목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상징되는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경제 전반에서 중앙은행의 입김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일본은 정도가 훨씬 심했다.
중앙은행이 경제에 풀어낸 유동성의 규모가 압도적이었고, 중앙은행이 매입한 자산의 종류도 파격적이었다. 경제에 유동성 공급을 늘리면 중앙은행의 자산이 늘어나게 되는데,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전인 2008년 8월 일본은행의 GDP 대비 자산 규모는 20.5%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이 15.3%,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6.1%여서 당시에도 일본은행은 경제 규모 대비 유동성을 상대적으로 많이 공급하고 있었지만, 최근 10여년 동안 격차가 극단적으로 확대됐다. 올해 2월 말 GDP와 비교해본 중앙은행 자산은 일본은행이 127.5%, ECB가 50.6%,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27.0%이다.
일본은행의 유동성을 푸는 방식도 파격적이었다. 통상적으로 중앙은행은 만기가 짧은 단기국채 매입을 통해 경제에 유동성을 공급한다. 민간은행들이 중앙은행에 단기국채를 팔면, 중앙은행은 국채 매입자금을 민간은행이 중앙은행에 개설한 지급준비금 계좌에 넣어줌으로써 유동성 공급을 늘린다. 중앙은행이 만기가 긴 장기국채와 주택담보부채권 등을 매수하는 양적완화도 교과서적인 중앙은행의 활동 범위를 넘어서는 정책이었지만, 일본은행은 파격적으로 주식까지 매입했다. 일본 증시 상승에는 일본은행이 큰 지분을 가지고 있다.
다만 일본은행이 통화정책 정상화를 공언하고 있어 향후에는 정책 기조의 변화가 예상된다. 현재 -0.1%인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장기국채 금리의 등락 허용 범위를 높일 경우 일본 주식시장이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예고된 악재는 악재가 아니라는 증시 격언이 있지만 일본 증시의 중앙은행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점에서 경계심을 가져야 될 때라는 생각이다.
한편 일본의 탈디플레이션 정책이 일본 고령자들에게 동의를 얻을 수 있을지도 관심 있게 지켜볼 포인트이다. 디플레이션은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30년’을 상징하는 병리적 현상이다. 경제가 끓어오르면서 발생하는 인플레이션이 급성질환이라면, 디플레이션은 경제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만성질환이다. 디플레이션 기대심리가 고착화되면 소비가 위축된다. 물가가 하락할 것이라는 컨센서스가 형성되면 꼭 필요한 소비만 이루어지고, 예비적 동기 또는 재고 확보 목적의 소비는 이뤄지지 않게 된다. 곧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공고한 상황에서는 당장 구매해야 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탈디플레이션 정책도 관심 포인트
디플레이션은 경제에 큰 해악을 미치지만 고정된 수입으로 살아가야 할 연금생활자들은 디플레이션 친화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은퇴한 연금생활자들이 대표적이다. 연금 수령액이 물가에 연동해 조정된다고 하더라도, 물가지수가 생활물가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연금소득은 기본적으로 경직성을 가진다. 제한된 소득으로 살아가야 할 연금소득자 입장에서는 물가가 떨어져 돈의 구매력이 높아지는 디플레이션이 꼭 나쁜 일인 것만은 아니다.
반면 부를 쌓아가야 할 젊은이들에게 디플레이션이 가져오는 무기력은 독(毒)이다.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고 모든 질서는 고착화된다. 얼마 전까지 외신을 장식한 연애도 기피하는 일본 청년세대의 모습이나, 일본 정치권에서 2대 혹은 3대 세습 정치인들이 다수라는 뉴스는 고령자가 주도하는 디플레이션 사회의 그늘로 볼 수 있다.
일본 기시다 총리가 ‘디플레이션 탈피’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일본도 정상적인 인플레이션 경제로 바뀌었다는 선언일진대, 인플레이션을 국민들이 수용하기 위해서는 소득이 늘어나야 한다. 일본 정부가 기업들에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고, 일부 대기업들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임금노동자들은 인플레이션에 대처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연금생활자는 어떨까. 연금소득은 임금소득처럼 탄력적으로 늘어나기 어렵다. 고대했던 탈디플레가 가시화되고 있는 요즘 상황에서도 기시다 총리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는 것은 이런 변화가 일본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고령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