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4) 룸살롱 - 욕망이 춤추는 지하도시

2013.02.01 19:47 입력 2013.02.12 11:35 수정
박송이 | 시인

‘성·권력의 지하 판타지’ 그 속에 은폐된 소외와 외로움을 보다

여기는 금녀의 집이던가요. 밀실 문화의 최고봉으로 치자면 풀살롱이 단연 으뜸이겠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그 세계를 모릅니다. 나는 야설이라도 한 편 써야 할 판입니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모르는 세계, 술을 따르는 자와 술을 마시는 자가 뒤엉킨 세계, 몸을 파는 자와 몸을 사는 자가 한 몸인 세계를 말입니다. 우리는 지상과 지하로 세계를 간단하게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밝음과 어둠을 가래떡 썰듯 잘라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세계가 그렇게 단 번에 나뉘고 잘리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면요. 이쪽과 저쪽은 저쪽과 그쪽이 되고 저쪽과 그쪽은 그쪽과 이쪽이 된다면요. 이것은 단순한 말놀음이 아니라 구중궁궐 속으로 들어가니 이전에 본 적 없는 세계가 떡하니 펼쳐져 있다면요. 우리가 아는 세계가 실은 우리로부터 감춰진 세계라면요. 오늘날 4대강의 부실이 하나둘 생겨나고 우리가 그 부실을 땜질을 해서 보강을 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부실은 사라지는 걸까요. 언젠가 그 부실은 또 다시 부실을 보일 겁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실은 우리로부터 감춰진 세계라면요. 나는 막차에 오른 사람처럼 침울합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가로수만이 아닙니다. 헐벗은 전단지와 술 취한 남자가 전봇대를 붙잡고 구토를 하는 중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성기를 내놓고 대낮에 활보한들 그게 뭐 대수겠습니까. 성기는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성기를 내보인 성기의 주인만 나쁜 놈이 되는 세상입니다.

나는 항상 그곳이 궁금합니다. 땅강아지가 흙 속을 헤집듯 남자들이 드나드는 그곳 말입니다. 룸살롱은 단순히 성적인 관계 이상의 성적인 판타지를 아우르는 공간 그 이상일 겁니다. 오늘도 지상은 유흥업소를 단속합니다. 대대적으로 기사를 올리고 지하 종사자들은 대대적으로 점퍼를 뒤집어쓰고 바깥으로 끌려 나옵니다. 붙잡는 자와 붙들린 자는 그 언젠가 마주한 얼굴들이 아니었을까요. 알다가 모를 일입니다. 안마방, 휴게텔, 오피스텔, 대딸방, 키스방, 풀살롱, 룸살롱, 단란주점, 귀청소방 등 나는 이 시대의 모든 방들의 종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하세계의 방을 나열해 봅니다. 미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유흥업소, 성매매, 카드깡, 금품수수, 콘돔, 성범죄, 가혹행위, 음모, 접대, 계곡주, 퇴폐업소, 안마시술, 몰카, 포르노, 에이즈, 인신매매, 홍등가, 호빠, 매음 등 온갖 지하세계의 관련어를 떠올려 봅니다. 역시 미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가장 큰 특징은 성매매가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겁니다. 국가가 불법 퇴폐업소 근절을 위해 선진시민의식 정착 운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는 말은 지하세계는 손을 뻗으면 손이 닿지 않을 은밀한 곳으로 빠르게 뻗어나가고 있다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지하는 여전히 공사 중입니다. 개가 풀을 뜯고 있을 때 우리는 그걸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자빠졌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림 | 문훈 문훈건축발전소 소장 이미지 크게 보기

그림 | 문훈 문훈건축발전소 소장

■ ‘솔까말’적 세계관

문훈 건축가(이하 문훈)의 작품은 한 편의 거대한 카툰 같습니다. 대사 없이도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카툰 말입니다. 그림 자체가 그림의 전부입니다. 그러나 그림의 이면은 복잡합니다. 우리는 이 그림의 이면을 추적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림의 바깥인 검은 통로를 따라가야 합니다. 총 15개의 장면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지하담론을 형성하는 걸까요. 장면의 배치는 자유롭습니다. 룸살롱의 공간을 조각조각 나눠 장면화하고 있습니다. 건축물의 조감과 계단을 제외하고는 각 장면은 룸살롱의 실내 투시도라 할 만합니다. 다시 말해 단면도와 평면도의 시각적인 극대화로 룸살롱의 실내 풍경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간을 분리시켜주는 것은 흑색으로 처리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통로이면서 공간과 공간을 폐쇄시키는 매우 복합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 공간은 이 미로의 구조 속에 연결되어 있는데 이렇게 건물을 잘라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문훈의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훈은 지하세계를 숨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그 감추어진 세계를 노골적으로 폭로하자는 쪽입니다. 이것은 문훈의 ‘솔까말’적인 세계관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자, 들여다 보십시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섹스하는 갖가지 추태로 널브러진 그림입니다. 건물의 내벽과 인테리어는 서양의 고대 왕실의 느낌을 자아냅니다. 인테리어는 대체로 금색과 빨강과 흑백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마치 고객을 황제처럼 모시고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게 합니다. 이들 장면과 장면 사이는 서빙하는 남자와 애프터를 나가는 여자의 거리만큼이나 참으로 어색하고 삭막합니다. 또 어떻습니까. 그림 속의 남자들과 여자들은 서로 잘 어울리고 밀착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내뱉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이곳은 허탈하고 지독한 냄새만 떠돌고 있습니다. 그림의 대사 없음은 결국 이곳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곳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설령 그렇다면 우리가 읽어내야 할 것은 대사 없음이 아니라 아무런 내용 없음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런 내용 없음으로 인해 감추어지고 은폐된 그 비밀에 대해 말입니다. 지하세계는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설계가 더욱 복잡해지는 구조를 갖기 마련입니다. 머리가 큰 사람이 머리가 작은 사람보다 더 크고 복잡한 혈관의 통로를 가지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웃자고 한 얘기니 죽자고 달려들지는 마십시오.

■ 위로라는 상품

룸살롱은 음주가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혹은 남자라면 혹은 진정한 남자가 되고 싶다면 가 봄직한 곳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의 밀실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밀실이라는 단어에는 밤문화, 성문화, 술문화, 퇴폐문화, 계약문화 등 온갖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 겁니다. 강준만이 <룸살롱 공화국>에서 한국 사회를 만들어낸 지하경제의 밀실 권력을 통렬하게 비판한 바 있습니다. 누가 봐도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 접대공화국, 칸막이공화국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지하에도 눈이 내리고 지하에도 바람이 붑니다. 지하에도 의리가 있고 지하에도 신뢰가 쌓입니다. 룸살롱에 가는 남자들에 한에서 그들은 한통속이 되는 겁니다. 한통속이 된다는 거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의식입니까. 서로 마음이 통한 사람들이 모인 동아리라는 뜻으로 말입니다. 그들만의 연대와 동지의식이 암묵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거지요. 글쎄요, 여기 지하세계에 무지한 제가 어찌 그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살롱은 과거 서양의 상류층 가정 응접실에서 흔하게 열리던 작가와 예술가들을 포함한 사교 모임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살롱에 관한 게 아닙니다. 유흥업소가 살롱이라는 단어로 은폐하는 그 많은 것들, 구체적으로는 살롱에 붙은 그 룸에 관한 겁니다. 우리는 방에서 비공개적인 친밀함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곳은 자기 보호와 성적으로 개방되지 못한 어색함을 덜어내기 위해 색다른 위안의 장소가 되는 셈입니다. 그러기에 룸살롱은 룸과 살롱이 겹쳐진 한국식의 이중으로 은폐된 공간입니다. 모든 관계는 종속에서 생겨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명찰과 타이틀이 가장 대표적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명찰로 사는 게 아니라 그저 나로 살 수 있을 때 자유롭지 않을까요. 우리는 늘 편안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갈망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내가 나답게 살기 어려운 문화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안식처라는 게 있을까요. 이름을 지운 얼굴들이 거기에 명찰을 던져 놓고 위로와 위안을 받는 곳 말입니다. 그러나 위로가 이렇게 돈을 지불하면 얻을 수 있는 경제구조에 놓여 있다면 이 얼마나 쓸쓸한 위로라는 상품입니까.

■ 역할이라는 게임

그렇다면 남자들에게 룸살롱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수컷의 세계에서는 힘이 중요합니다. 또한 남자의 판타지는 권력에 대한 판타지와 연결됩니다. 권력은 성과 돈과 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떼벌, 정자왕, 주님 등은 이러한 것을 희화화한 말일 겁니다. 우리는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권력 관계에서 서로가 계약으로 엮어진 자발적이고도 자발적이지 않은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이중 구조의 담론에 놓여 있을 때 우리는 각자 연기자가 되기로 작정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역할게임에 얽매여 있는 겁니다. 역할극과 같은 롤플레잉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술문화, 접대문화, 은폐, 권력관계 등에 대한 다양한 관찰이 오랜 시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룸살롱에서 하루살이 권력자가 될 수 있는 건 지당해 보입니다. 룸살롱에는 거짓페이스가 판을 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과 섹스의 트라이앵글 구조 속에 정작 나는 없습니다. 그럼 나는 어디에 있습니까.

홈플러스는 홈마이너스를 감춥니다. 다시 말해 행복은 불행을 감춥니다. 행복은 끔찍함과 대면했을 때 행복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결핍과 추함을 없애기 위해 판타지라는 신세계를 동경하게 됩니다. 판타지를 인간의 삶 속에서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성적인 판타지는 쾌락과 번식의 차원에서 불가피합니다. 그렇다면 단면으로 들여다 본 룸살롱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이곳에는 어떠한 고독과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마음을 내가 이야기하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억눌린 채로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외와 외로움이 만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그곳에 판타지를 삽입하는 겁니다. 룸살롱은 그 자체가 영화인 셈입니다. 픽션인 것입니다. 사실 그 자체는 없습니다. 진실게임, 언어게임, 성게임, 우정게임, 사랑게임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인식만이 아니라 느낌의 구조도 지배합니다. 말하자면 사랑은 사랑게임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있는 줄 아니까요. 그럼에도 나의 결핍과 동시에 사회 문화의 결핍이 겹치는 부분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야말로 퇴폐와 예술로 양분할 수 없는 그 어떤 지점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베케트의 말대로 우리는 더 잘 실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룸살롱은 우리가 더 잘 실패하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바람은 바람이 부는 대로 가는 거지 언제 한 번 책임지는 거 봤습니까.

■ 혼자 가는 남자

여기는 마지막 열차입니다. 방입니다. 미로입니다. 깜깜합니다. 계단은 지하로 내려가는 또 다른 길입니다. 나는 뒤통수를 쫓아갑니다. 혼자 가는 남자입니다. 가는 방마다 문이 열리고 가는 방마다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혼자 가는 남자는 술을 따르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 술이 채워지는 이상한 술잔입니다. 여자가 웃습니다. 여자는 남자에게만 웃습니다. 여자는 가령 에어컨이나 바나나 따위에게는 웃음을 팔지 않습니다. 여자의 정조는 생리대의 새 것처럼 갈아 끼움을 신조로 삼기 때문입니다.

남자는 똥을 싸면 똥이 내려가는 변기통에 엎어져 있습니다. 남자는 말이 없습니다.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같습니다. 막차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느낌을 아십니까라고 묻는 것도 같습니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데 홀로 어색하고 민망한 그 느낌 말입니다. 남자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남자의 얼굴이 변기통 속으로 쓸려 가는 상상을 합니다. 남자는 자기에게 접대를 받고 싶습니다. 오랜 숙원의 일처럼 남자는 자기를 접대합니다. 남자는 압니다. 이 모든 게 부질없고 허망하단 걸 말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압니다. 그러나 그게 영 싫지만은 않습니다. 지하철 3호선이 달려옵니다. 출입문을 닫습니다. 여기는 남자만 있는 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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