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2014.03.07 18:27 입력 2014.03.07 21:55 수정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깊은 신앙심과 수행 정진력이 깃든, 분업 통한 필사

“제가 세상에 살 때에 평상 아래 참기름을 묻어 두었고, 곱게 짠 베도 이불 사이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스님께서 부디 그 기름을 가져다 불등(佛燈)에 불을 붙여 주시고, 베는 팔아 경폭(經幅·경전을 베낄 때 쓰는 재료)으로 써 주십시오. 그러면 황천에서나마 은혜를 입어 이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망덕사의 선율 스님이 시주 돈으로 시작한 600여권의 <반야경> 사경을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명부(冥府) 관리가 인간 세상에 돌아가 보전(寶典) 간행을 마무리지으라며 돌려보냈고, 선율이 돌아오는 길에 만난 여인이 청한 내용이 이 글이다. <삼국유사> 선율환생 조에 나온다. 열흘 만에 살아난 선율이 여인이 말한 대로 하자 경폭을 보시한 공덕으로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났다. 사람들이 감동하여 서로 도와 <반야경>을 완성하여 동도(경주) 승사(僧司) 장서각에서 매년 봄·가을에 펼쳐 읽어서 재앙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통일신라 때 사경 공양이 얼마가 성행하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닥종이를 자초(紫草)로 염색하여 표지를 만들었다. 겉표지에는 보상화무늬와 역사상(力士像)을, 안표지에는 화엄경변상도를 금니·은니로 그렸다. 경문은 너비 29.2㎝, 길이 1397㎝의 권자본(卷子本) 형식으로 흰 닥종이에 묵서로 1줄에 34자씩 철심처럼 굵고 가는 필획의 대비가 조화로운 해서체로 구사되었다. |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은 닥종이를 자초(紫草)로 염색하여 표지를 만들었다. 겉표지에는 보상화무늬와 역사상(力士像)을, 안표지에는 화엄경변상도를 금니·은니로 그렸다. 경문은 너비 29.2㎝, 길이 1397㎝의 권자본(卷子本) 형식으로 흰 닥종이에 묵서로 1줄에 34자씩 철심처럼 굵고 가는 필획의 대비가 조화로운 해서체로 구사되었다. | 삼성미술관 리움소장

사경(寫經)은 불경을 베껴 쓰는 것이다. 시초는 패엽경인데, 인도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제자들이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했던 것을 불법 전파를 위해 다라나무 껍질에 베껴 쓴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은 처음에는 구송되었다. 이 때문에 사경은 300여년이 지난 후 대승불교의 <반야경> 계통 경전이 문자화되면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불법 전파나 독송을 위해 성행한 사경은 인쇄술의 발달로 신앙적 의미의 서사(書寫) 공덕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중국에서 사경이 시작된 것은 한역(漢譯) 불전이 유포되던 3세기 무렵이다. 진한시대 종이의 발명, 이후의 삼나무나 뽕나무 종이 제조기술 개발은 사경 발전을 촉진시켰다. 남북조시대 이래 왕실 귀족 사원에서는 일체경(一切經·수천 권에 달하는 대장경 전체)을 서사하는 불사와 전문사경생도 양성되었다. 이 때부터 수·당에 이르는 시기 중국의 사경은 대부분 역경사업과 관련이 있고,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아시아로 퍼져 새로운 문화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사경이 전해진 것도 불교 전래 무렵이다.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전진의 왕 부견이 순도를 파견해 불상과 함께 불경을 전해주었다. 백제의 경우 불교가 공인된 것은 384년(침류왕 원년)이고, 신라는 150여년 늦은 528년(법흥왕 15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공식화되었다. 불법 전파를 위해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경전을 붓으로 일일이 필사했다. ‘무구정광대탑다라니경’과 같이 7세기 말, 8세기 초의 목판인쇄에 의한 판본경, 즉 인경(印經)이 제작된 이후에는 인경으로 부처님 말씀을 대중에게 전하였고, 사경은 서사공덕을 위한 장식경 성격으로 바뀌었다. 요컨대 필사의 한계와 대량 유통보급의 필요성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이 같은 시기에 인쇄술을 발명하였고 사경의 정보전달 기능은 기하급수적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필 사경은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국보 제196호) 권43이다. 이 사경은 통일신라 754년(경덕왕 13년)에서 755년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황룡사 연기 법사가 자신의 부모를 위해서 발원한 장식경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영원토록 보존하고자 하는 정법수호 의지와 불법을 되새김으로써 얻어지는 수행과 신앙, 공덕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불법 전파라는 1차적 기능보다는 신앙을 굳건히 하고 공덕을 쌓으며 수행을 성취하는 종교 행위 본연의 의미가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경 말미에 작은 글씨로 쓴 14행의 발문에는 경전과 변상도를 조성한 절대연대, 발원자, 조성 목적, 제작 과정 및 사성의식, 발원내용, 화사(畵師), 필사자는 물론 경심장(經心匠)과 종이 만드는 사람(紙作人), 경의 제목만을 쓰는 필사(經題筆寫)가 기록돼 있어 사경이 철저한 분업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밝혀주고 있다.

“내가 이제 일념으로 서원하노니 미래세가 다하도록 이루어진 이 경전 훼손되지 말지어다. 설령 삼재로 대천세계가 부서지더라도 이 경만은 허공과 같이 흩어지고 부서지지 않으리. 중생들은 이 경전을 통해서 부처님을 보고, 경문을 듣고, 사리를 공경하리니 보리심을 내어 물러나지 않아 보현보살의 인을 닦아 성불하리라.(我今誓願盡 未來所成經典 不爛壞 假使三재破大千 此經空不散破 若有衆生此經 見佛 聞經 敬舍利 發菩提心 不退轉 脩普賢因速成佛)”

‘설령 삼재로 대천세계가 부서지더라도 이 경만은 허공과 같이 부서지지 않으리’라고 발원하는 지점에서는 연기 법사의 원력과 신앙심이 얼마나 넓고 큰지 읽혀진다. 여기서 일상의 정보를 전달하는 문자가 부처가 되고 종교가 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털끝만큼도 흐트러짐 없이 정성과 믿음을 다 해서 일자삼배(一字三拜·한자 쓰는데 세 번 절하고 쓴다)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쓴 것이 아니라 박아내다시피 했다. 이 사경은 화엄사에서 754년(경덕왕 13년) 갑오년 8월1일에 시작하여 을미년(755년, 경덕왕 14년) 2월14일에 완성되었다. 약 7개월에 걸쳐 진행되는 사경공양 자체가 부처님과 하나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품반야경> ‘대품명’ 제32장에 ‘선남자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단지 서사(書寫)해 책으로 만들어 집에서 공양만 하고 기억도 하지 않고 읽지도 않으며 외우지도 않고 설하지도 않으며 바르게 사유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세에 이와 같은 공덕을 얻게 된다’고 할 정도다. 하지만 여기서 서사란 단순히 경을 옮기는 일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대천세계가 부서져도 이 경만은 부서지지 않는’다는 깊은 신앙심과 수행 정진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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