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거 혁명’ 이후 반세기…우린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에 산다

2021.12.13 21:26 입력 2021.12.13 21:28 수정
박정현

1960년대 마포아파트 프로젝트

1963년 마포아파트 항공 사진. 초기 계획에서 축소된 상태로 Y자형 6동이 먼저 준공됐다.   국가기록원 제공

1963년 마포아파트 항공 사진. 초기 계획에서 축소된 상태로 Y자형 6동이 먼저 준공됐다. 국가기록원 제공

군사정변 이후 5개월 남짓 지난 1961년 11월1일 개막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서 최고 영예인 대통령상은 건축부에 돌아갔다. 수상자는 육군 이병으로 복무 중이던 강석원과 설영조였고, 작품은 ‘육군 훈련소 계획’이었다. 현역병이 설계한 훈련소가 당대 최고의 예술행사 중 하나였던 국전에서 가장 탁월한 성과로 선정된 것은 국가 권력기구 전체가 군인의 손에 들어간 당시 한국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결과였다. 건축이 국전에 참여한 1955년 이래 대통령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군사정권은 국전을 자신들이 펼칠 사업을 소개하는 자리로 적극 활용했다. KBS가 첫 전파를 송출하기도 전인 1961년 가을, 최대의 전시 국전은 군부가 펼칠 사업을 홍보하고 선전하기에 대단히 유용하고 중요한 장이었다.

건축부의 다른 출품작인 강명구의 ‘마포에 건설 중인 주택영단 아파트’ 역시 이런 사정을 잘 보여준다. 1세대 현대 건축가 중 한 명인 강명구는 당시 대한주택영단 주택건설위원이었고, 주택영단은 대한주택공사(현 LH·한국토지주택공사)의 전신이었다. 그러니까 준공무원이 국영회사가 짓고 있는 아파트를 국전에 출품한 셈이다. 이 아파트가 바로 ‘마포아파트’다. 마포아파트는 쿠데타 세력이 만든 최고 권력기구인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대표적인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군부는 자신들이 무능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다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스스로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또 2년 뒤 약속한 정권 이양을 번복하고 계속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시적인 성과를 제시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면서 프로파간다에 가까운 온갖 장밋빛 청사진이 쏟아져 나왔지만, 당장 눈앞에 만들어져 있는 현실이 필요했다. 이는 건축과 건설의 몫이었다. 1961년 5월20일부터 1963년 12월17일까지 2년6개월가량의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군부가 완성한 프로젝트는 국립원호원, 새나라자동차공장, 워커힐호텔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일반 시민의 눈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한국전쟁 상이용사를 위한 병원이나 불법 정치자금 확보를 위한 자동차 조립공장, 주한미군의 휴양과 향락을 위한 호텔 등은 건물의 위치나 국민 정서 등에서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마포아파트 초기 계획안 투시도. 대한주택영단 주택 1961년 12월(7호)

마포아파트 초기 계획안 투시도. 대한주택영단 주택 1961년 12월(7호)

군부의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계획돼
서울 한가운데 세워진 현대식 주거단지

준공 직후에는 낯설게 여겨졌지만
10년 만에 선거를 좌우하는 열쇠가 돼

마포아파트는 달랐다. 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1960년대 초 서울 한가운데 세워진 현대식 주거 단지는 시민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계획, 준공, 분양, 입주 후 생활까지 이어지는 아파트의 매 주기를 홍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야말로 속도전으로 진행되어 11월 국전에서 대중에 처음 소개된 마포아파트의 초기 계획은 한 달 뒤 발간된 대한주택영단(이하 영단)의 기관지 ‘주택’ 12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다. 7월부터 서울대학교 교수진을 중심으로 석 달 동안 준비한 것으로 알려진 마포아파트 초기안은 10층 규모의 Y자형 6동, T자형 2동, I자형 3동으로 총 1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위 주거는 9평형 498가구, 12평형 400가구, 15평형 260가구로 총 1158가구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결코 작지 않은 단지였다. 이 정도 규모의 아파트단지를 단기간에 짓기 위해서는 비어 있는 땅이 있어야 했다. 잘게 쪼개진 필지를 매입해 사업을 벌여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영단은 마포형무소의 노역장으로 사용하던 채소밭을 내무부로부터 매입해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 이어 영단은 10층 규모의 아파트 설계를 건축가들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서 10층 높이의 아파트를 설계한 경험이 있는 건축가는 전무했다. 몇 년 전 정부와 서울시가 추진한 서울 도심 가로변 건물 고층화 계획의 목표가 불과 3층이었다. 6년 뒤 정부종합청사 현상설계에서 건축가들이 제시한 최고층이 12층 내외였다. 한옥이든 양옥이든 집의 표준은 단층 단독주택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10층 아파트라는 야심찬 계획이 미국의 반대에 부딪힌다. 최근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 박철수 교수가 발굴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경제협조처(USOM)는 영단의 초기 계획을 조목조목 비판했다. 몇몇 항목을 옮겨보면, “지형 조건에만 주목한 도면은 완성도가 너무 떨어진다” “배치도에는 오직 도로계획과 건축물 배치만 표시되어 있어 진출입 동선, 상하수도 계통, 전력망과 조명, 표면 배수 등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방화계획 역시 불분명하다” “발코니의 크기 역시 거주공간에 비해 과도하고” “2.3×2.6m의 침실은 좁다” “안타깝게도 도면은 … 어느 것도 자세하게 표기하지 않고 있다” “구조설계에 대한 검토가 전혀 없다” “도면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취사연료로 연탄을 상정하고 있는데 이로 인해 주방에 집중하게 될 연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폭우 대비책이 없다” 등이다. USOM은 영단의 마포아파트 계획이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일축했다. USOM 담당자는 마치 대학 설계 수업의 튜터처럼 영단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검토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불과 몇 달 전에 시작한 프로젝트였으므로 방재, 전기, 설비 등의 세세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다. USOM 담당자는 계획이 끝나기 전에 공사부터 시작하는 한국의 사정을 짐작도 못했을 것이다. 쿠데타, 영단의 재조직, 마포아파트 건립 결정, 택지 마련과 설계, 국전 전시, USOM의 반대까지 전부 여섯 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7)‘주거 혁명’ 이후 반세기…우린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에 산다

1963년 대통령 선거의 박정희 후보 포스터(위 사진)와 1971년 포스터. 후자에는 그사이 정권의 치적이 된 마포아파트가 포함됐다.

1963년 대통령 선거의 박정희 후보 포스터(위 사진)와 1971년 포스터. 후자에는 그사이 정권의 치적이 된 마포아파트가 포함됐다.

오늘날 아파트는 한국 사회의 ‘태양’
개인의 인생부터 정권의 명운까지 결정

어떤 기념물보다도 더 큰 영향력을 행사
20세기 한국 건축 최고 발명품일지도

원조와 차관으로 한국의 경제를 좌우한 미국의 반대를 한국 정부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미국의 반대와 여러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영단은 6층으로 규모를 조정한다. Y자형 6동이 1962년 12월28일 1차 준공되었고, I자형 4동은 1965년 5월12일 준공되기에 이른다. 초기 안에 있었던 T자형 2동은 지어지지 않았다. 규모는 줄었지만, 완공된 마포아파트가 선사한 시각적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쿠데타 세력의 자평처럼 마포아파트는 ‘혁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좁은 골목길과 한옥의 기와가 낡은 풍경을 빚어내는 주택지를 일거에 지워버리고 잔디가 깔린 넓고 평활한 땅에 내려앉은 아파트는 한국의 미래였다. 준공 직후에는 이 미래가 낯설었다. 아랫집 연탄가스가 윗집으로 흘러들어갈지 모른다는 불안감 등으로 입주를 꺼리는 이들도 있었다. 마포아파트가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되고, 아파트단지가 새로운 삶의 표준으로 자리 잡기에는 다소 시간이 필요했다.

마포아파트에 첫 입주민이 이사를 시작하고 10개월 정도 지난 1963년 10월15일 제5대 대통령 선거가, 다시 한 달 뒤인 11월26일 6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이 주축이 되어 만든 민주공화당은 이 두 선거에서 ‘황소’를 선거 캠페인의 모티브로 삼았다. 선거 포스터와 걸개에는 농부가 황소로 쟁기를 끄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대통령 선거를 위한 구호는 “새 일꾼에 한 표 주어 황소같이 부려보자!”였다.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열린 국회의원 선거를 위한 구호 역시 “한 번 던져 뽑은 황소 두 번 던져 부려보자!”였다. 전체 인구의 70%가 농업에 종사하던 1960년대 초 국민에게 호소하는 이미지로 아파트를 삼기에는 시기상조였다. 그러나 마포아파트를 시작으로 아파트단지는 이내 서울과 전국 도시의 거의 유일한 개발 전략이자 주택 공급 방식으로 자리 잡는다. 이후 모두가 아는 것처럼 아파트단지는 한국 사회의 태양이 된다. 정권의 명운, 개인의 인생을 좌우하며,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계층의 재생산, 입시와 교육체계 모두 아파트단지를 중심으로 회전한다. 어쩌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포괄해 아파트는 20세기 한국 (건축의) 최고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어떤 기념비 건물도 마포아파트보다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주택 형태만 따진다면 한국 아파트가 특별할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뒤엉킨 복합체로서 아파트는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의 산물이다.

혁명이라 부른 쿠데타의 성과를 당장 눈앞에 보여주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모아 국내외의 반대를 무릅쓰고 마포아파트를 건설한 지 10년 뒤인 1971년 박정희는 3선 개헌을 통해 세 번째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그사이 한강변 남북을 따라 중산층을 위한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있었다. 황소는 이제 선거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다. ‘황소를 끌던 농부’는 이제 “공화당과 함께 풍요한 결실과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슬로건으로 바뀌었다. 선거를 일주일여 앞두고 일간 신문에 일제히 실린 광고는 빼곡하게 맺힌 나락을 보며 미소 짓는 농부의 얼굴과 나란히 마포아파트 잔디밭에서 아이와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부부의 사진이었다. 이렇게 아파트는 선거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후 아파트 가격과 공급 정책이 선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포아파트는 이미 오래전인 1994년 재건축되면서 사라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에 산다.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7)‘주거 혁명’ 이후 반세기…우린 여전히 ‘마포아파트 체제’에 산다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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