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작용하는 공간의 힘…경계를 허물고 활력을 불어넣다

2022.12.13 22:39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⑨ 김정임 서로아키텍츠 대표, 업무 환경 재구조화 프로젝트

김정임이 설계한 SK D&D 본사 업무공간은 당시 낯설었던 자율좌석제를 도입했다. 김정임은 ‘기존 공간 회로를 다시 연결하여 막힌 혈관을 풀어주는 것’을 상상했다고 한다. 노경 제공

김정임이 설계한 SK D&D 본사 업무공간은 당시 낯설었던 자율좌석제를 도입했다. 김정임은 ‘기존 공간 회로를 다시 연결하여 막힌 혈관을 풀어주는 것’을 상상했다고 한다. 노경 제공

서울역 앞 대우빌딩 ‘수선’
6만개 LED로 ‘새 인터페이스’

서울역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야에 들어오는 구 대우빌딩은 서울 입성을 알리는 상징적인 건물이다. 이제 서울스퀘어로 이름이 바뀐 이곳 정면에 불이 밝혀지고 미디어 작품이 나오면 서울역 일대는 공공 상영장이 된다. 가로 100m, 세로 약 80m의 거대한 사각 면 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미지는 회색 도시를 아름답게 수놓는다. 그중 줄리안 오피의 ‘크라우드(Crowd)’는 대도시 서울과 참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표정 없이 간결한 선으로 그린 인물들이 리듬감 있게 걷고 있는 모습은 군중 속 우리를 반영한 것 같다. 그 작품을 볼 때마다 분주히 움직였던 오늘의 나를 보는 듯한 공감을 받았다. 그때 서울스퀘어는 무뚝뚝한 건물이 아니라 위로를 건네는 다정한 상대였다. 나만 그런 벅찬 감정을 느끼지는 않았을 테다.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는 대중과 적극적으로 교감을 시도한다. 2014년에 방영한 인기 드라마 <미생>은 이러한 대중적 감수성을 증폭시켰다. 서울스퀘어 옥상은 <미생> 등장인물들이 회한을 나누고 서로를 다독였던 곳으로 극에서 가장 많이 노출됐다. 일반인 방문 기회가 거의 없는 오피스 건물이지만 서울스퀘어만큼 보통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건물은 많지 않을 것이다. 벽처럼 커다랗고 무표정한 건물이 다양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건네는 무엇이 되기까지 그 뼈대를 만든 건축가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 변화를 위한 주요 디자인 아이디어를 당시 30대 후반이었던 건축가 김정임이 냈다. 그는 “아트워크를 통해서 건물의 이미지를 바꾸자”라는 당찬 제안을 기업 주주들 앞에서 통과시켰다.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 박영채 제공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파사드. 박영채 제공

도시에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세우다

김정임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아이아크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로 대우빌딩 리노베이션 디자인을 책임졌다. 아이아크와 정림건축의 협력으로 공모전에 당선된 것이 계기였다. 이 건물은 원래 대수선을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으나, 법규 제약으로 수선에 그쳤다. 수선이란 건축 구조를 바꾸거나 증축하지 못하고 외관과 인테리어 변화 정도만 주는 소극적인 작업이다. 그 정도의 변형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회의에 빠진 상황에서 김정임은 다른 방식의 디자인을 다시 제안했다. 건축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미디어 캔버스’라는 개념도 그때 나왔다. 단 한 평의 경제적 손실도 거부하는 엄정한 기업 비즈니스 판에서 젊은 김정임은 만장일치로 제안을 가결시켰다. 개인 건축주가 아니라 큰 기업을 상대로 안을 바로 관철하는 것은 건축가라도 흔한 경험은 아니다. 건축주는 이 건물이 미디어에 자주 회자되는 화제성 있는 건물이 되길 요청했다. 김정임은 외관을 건축적으로 크게 바꾸지 못하는 대신 LED 조명 6만개를 심어 새로운 인터페이스를 창출했다. 버스환승센터가 생기면서 서울역 앞이 더욱더 빠른 속도로 에너지가 증폭되는 장소가 될 것을 염두에 둔 안이기도 했다. 가벼워진 외관만큼 진입하는 로비 공간과의 연결도 중요했다. 외관의 달라진 인상과 분위기를 내부 공간까지 잘 이어서 건물 전체를 질서 있게 정돈하는 일이 필요했다. 보통 건축과 인테리어가 구분된 한국의 디자인 생태계지만 김정임은 그때 건물 내외부를 모두 맡아 총체적으로 작업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김정임

김정임

이야기로 공간을 짓다

건축가 유걸이 설립한 아이아크 건축사무소에서 17년간 일한 김정임은 2004년부터 아이아크의 공동 대표로 일했다. 젊은 여성이 설계 조직의 공동 수장으로 일하는 것이 흔치 않은 시절이었다. 아이아크에서 유걸을 비롯, 다른 건축가들과 파트너로 일했지만 각자 작업 성향이 달랐고 조직은 이를 존중했다. 서울스퀘어 이후 김정임에게 오피스 리노베이션 작업 의뢰가 자연스레 들어왔다. 마침 2010년 들어서 기업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사옥을 재조직하는 움직임이 과거보다 활발해졌다. 건물 전체는 어렵더라도 입면과 로비 등 노출이 많은 핵심 공간을 바꾸는 일들이 많아졌다. 제일기획 공간 개선도 이런 맥락에서 진행된 작업이다.

김정임이 제일기획 로비 리노베이션에서 내세웠던 개념은 ‘1000개의 창’이었다. 그는 이런 브랜딩 스토리를 제시하는 게 건축가로서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종다양한 사람들, 즉 기업이라는 대형 조직 안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이어주는 중요한 고리다. 사람 마음을 움직이고 기꺼이 거기 빠져들게 만드는 힘. 그것은 때로 건축 개념보다 중요했다. 인테리어 작업의 경우 건축과 달리 디자인 설득 논리를 개발하기 힘든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건축은 법규, 구조, 설비 등 전문 항목으로 제한 사항들이 만들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일을 끌고 갈 수 있지만 인테리어로 넘어오면 취향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여러 이해관계자의 각기 다른 목소리를 합일하기 위해 강한 축이 필요하다. 1000개의 창은 아이디어의 생태계인 광고 회사의 특수성과 이상을 반영하는 주제였다. 건축주와 사용자는 그 제안을 환영했고, 건축가는 즉각 물리적인 형식으로 번역했다. 이야기로 공간을 짓는 일이었다.

SK D&D 본사 업무공간. 노경 제공

SK D&D 본사 업무공간. 노경 제공

SK D&D ‘오피스 플래닝’
막힌 혈관 뚫듯 공간 회로 연결
직원에 유연한 근무 환경 조성

오피스 빌딩에서 오피스 플래닝으로

2012년 김정임은 독립하여 서로아키텍츠(Seoro Architects)를 열었다. 삼성전자 의뢰로 받은 ‘글로벌 업무공간 계획 가이드라인’ 수립이 첫 일이었다. 그 연구에서 김정임은 서울스퀘어와 제일기획 등의 경험을 기반으로 업무 행태 변화에 따른 사무 공간의 새로운 쟁점들을 짚어볼 수 있었다. 이처럼 사옥과 업무 공간을 중심으로 건축과 인테리어를 함께 총괄하는 서로아키텍츠는 자연스럽게 공간 조직을 계획하는 일에 두각을 나타냈다. 업무 공간 짓기(오피스 빌딩)뿐만 아니라 업무 공간 계획(오피스 플래닝)으로 업역이 확장됐다. 관계를 맺는 대상을 뜻하는 우리말인 ‘서로’가 사명인 조직에 걸맞은 행보였다. 김정임은 “현대사회에서 변화하는 구성요소 간의 상호 작용과 관계성을 고찰하고 건축 공간에 반영하는 것”에 관심 있다고 설명했다. 삶의 양식들을 분석하고 이를 공간에 맞게 재조직화하는 일은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건축이 작동하는 또 다른 영역이다.

서로아키텍츠의 대표적인 오피스 플래닝 작업은 SK D&D 본사 업무공간 개선 사업이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업무환경을 위한 사무공간 디자인’을 목표로 2018년쯤에 시작된 작업이었다. 이 작업은 조직 환경과 결부된 일이어서 단순히 실내 디자인 일만도 아니었다. 건축 내외부를 통합적으로 보고 업무 공간의 새로운 틀을 짜야 하는 일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건물 외관이나 외부인 출입이 빈번한 로비 공간에 집중되었던 기업 사무 공간의 재구조화 작업이 실제 그 공간을 가장 오래 사용하는 근무자의 환경에 집중됐다. 분석 결과 건물 자체는 근사하나 업무 환경은 경직되어 활력이 부족했다. 김정임은 기존 공간 회로를 다시 연결하여 막힌 혈관을 풀어주는 것을 상상했다. 사용자들의 일하는 풍경이 풍부해지고 경험의 접점들을 높이고자 했다. 사람들이 회의하는 모습, 대화하는 모습 등 모든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게 구성했다. 이 프로젝트에서 김정임은 자율 좌석제를 도입했다. 지금은 코로나19 영향으로 익숙한 형식이지만 이때만 해도 낯선 시스템이었다. 직원은 유연한 근무 환경을 얻고 기업은 남은 근무 공간을 다른 임대 자산으로 운영했다. 유연 근무는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학교에도 공간의 경계 풀어
공간의 스펙트럼 확장 시도

학교, 또 다른 가치 생산의 장소 변화

회사 사무실과 유사한 공간 형식을 가진 곳은 학교다. 역사적으로 두 곳 모두 근대의 산물이다. 오랫동안 개별로 집에서 일하고 교육받았지만 근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생활하는 회사와 학교가 마련됐다. 사용자 세대는 다르지만 업무 공간과 학교 모두 불특정 다수가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장소다. 유무형의 집합 지식들이 생산되고 교류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공간 형식은 보수적이어서 다른 어떤 곳보다 몇 십년 전과 지금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다. 2017년 서울시 교육청이 주관한 학교 공간 재구조화 사업은 김정임이 오피스 플래닝으로 경험한 것들을 학교라는 공간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는 ‘꿈을 담은 교실 만들기’(꿈담교실)의 첫 총괄 건축가로 임명되어 3년간 활동했다. 이 일을 맡을 여러 건축가를 섭외하고 교육 전문가들과 협의하며 그들과 함께 학교 교실을 새롭게 만들어나갔다.

그는 아이들 교육 공간도 사무 공간처럼 오랜 시간 획일화된 단단한 경계를 무너뜨리고 느슨하면서도 다층적인 경계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놀이와 모둠 활동이 많아 상호작용이 활발한 저학년 학생에게 더욱 필요한 공간이었다. 그가 작업한 서울 동답초등학교나 원효초등학교에서 볼 수 있듯 교실과 복도가 열리고 중첩되는 모습은 공간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디자인의 핵심은 공용 공간과 기능 공간의 경계를 풀어내는 것이었다.

“사회 구성요소 간 상호작용
관계성 고찰…공간에 반영”

생산에 저항하는 생산

서로아키텍츠는 올해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10년 동안 여러 유형의 건축 작업을 했지만 앞서 말한 대로 김정임은 개인의 사적 공간보다 대다수 사람이 유무형의 가치를 생산하는 집합 공간들을 많이 담당했다. 서로아키텍츠의 ‘서로’는 이렇듯 타인을 이해하는 건축을 하고 싶다는 뜻을 품고 변화가 필요한 곳에 적절한 가치와 활력을 부여하는 일을 해왔다. 성인의 업무 공간, 어린이들의 학습 및 창의 공간 다음에 서로아키텍츠가 맡을 또 다른 생산 공간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근 양천근린공원에 완성된 숲속도서관을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간 김정임이 주로 했던 작업과는 달리 기업이 아니라 공공이 발주처인 그 건축물은 오랫동안 터를 지킨 나무들과 지형의 모습을 해치지 않고 소박하게 자리 잡은 휴식 공간이다. 작은 지식 저장소이기도 한 쉼의 공간은 오늘날 또 다른 의미의 생산적인 활동을 담는 곳이다. 과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 돌보지 않았던 쉼, 휴식, 나이듦 이런 삶의 리듬들이 우리 일상의 생산적 가치로 돌아오고 있다. 요즘 특히 노인 주거와 커뮤니티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김정임의 말을 생각하면, 그 역시 기존 생산에 저항하는 생산의 또 다른 풍경을 고민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서로아키텍츠가 향후 새로운 10년 사이 그려낼 또 다른 삶의 공간들이 어떻게 조직될지 기대된다.

나는 최근 서울스퀘어를 서울역 앞에서 보는 것도 좋지만 인도교가 된 서울로7017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멋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서울역에서 올려보던 미디어 파사드와 공중 보도에서 걸으면서 보는 미디어 파사드는 규모의 감각이 달랐다. 공중 보도에서 보는 미디어 파사드는 내 신체와 더 가까이 접속해 있다. 최근 3D 아나모픽(anamorphic) 기술을 이용하여 건물 외관에 훨씬 몰입적인 이미지를 선보이는 진보된 미디어 파사드에 비하면 이제 서울스퀘어의 미디어 캔버스는 고전처럼 보인다. 10여년 동안 꾸준히 그 자리를 지켜온 미디어 작품과 그 작품을 지지하는 건물이 빠르게 변화하는 서울에서 제자리를 지켜주고 있어 고맙다. 원래 가치 창출을 위해 시대에 발맞춘 새 얼굴을 선보였던 그곳이 이제 한편으로 속도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아이러니하다. 고가도로가 인도교가 되고 오늘의 미디어가 곧바로 오래된 미디어가 되어버리는 지금 우리가 챙겨야 할 건 너와 내가 일으키는 매 순간의 상호작용이 아닐까. 서울스퀘어와 나 사이를 압도했던 경계가 조금씩 부드럽게 와해되고 있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상호작용하는 공간의 힘…경계를 허물고 활력을 불어넣다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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