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설계한 집’으로 건축의 아름다움과 취약함을 말하다

2022.11.15 20:51 입력 2022.11.16 13:23 수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⑧ 김사라 다이아거날 써츠 대표, MMCA 과천 프로젝트 2021 : 예술버스쉼터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프로젝트. 예술버스쉼터 대공원역 정류장. 박수환 제공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프로젝트. 예술버스쉼터 대공원역 정류장. 박수환 제공

작품서 무언가 짓기보다 짓지 않는 행위로 ‘건축’에 대해 질문
건축가의 기존 건물 ‘의도’ 존중하며 새롭게 공간 읽기로 해석
‘도면’보다 건축가의 메시지 ‘사진·영상’에 담아 대중과 소통
최근작 ‘쓸모없는…’에선 정류장을 미술관 공간 경험으로 표현

마감 안 된 거친 건물 안에서 한 무용수가 힘겨운 몸짓을 하고 있다. 땅 아래로 꺼지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바닥인 듯 벽인 듯 단숨에 파악하기 힘든 공간에 밀착해서 수행하는 긴장된 몸짓은 관객의 집중을 이끈다. 2020년 서울무용영화제 최우수상을 받은 이 작품은 건축가 김사라가 기획한 <남이 설계한 집>이다. 안무가나 영상감독이 아닌 건축가의 무용영화제 수상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남이 설계한 집>은 김사라를 주축으로 영상·안무·소리·사진 등 다양한 예술가들이 협업한 다학제적 작업이다. 이 영상은 평소 우리가 의심 없이 믿어온 바닥과 벽의 관계를 다시 보게 만들었다. 건축가 자신이 설계한 건축물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남이 설계한 집’을 소재 삼아 만든 이야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다이아거날 써츠 대표 김사라는 이처럼 일반적인 건축 작업과 무관해 보이는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는 건축가다. 많은 젊은 건축가들이 공공건축 공모전에 도전해 학교나 동사무소와 같은 공공기관 리노베이션과 소규모 건물 설계로 기반을 다진 것과 다르다. 다이아거날 써츠 또한 주택이나 작은 근린생활시설을 설계했지만 대중과 평단의 주목을 먼저 받은 것은 <남이 설계한 집> 같은 영상 작업과 미술관 설치 작업이다.

‘노마딕경기아트페스타 2017 공공하는 예술’에 선보인 <마지막 장소>는 <남이 설계한 집>의 토대가 된 공간 실험 프로젝트다. <남이 설계한 집>과 마찬가지로 여러 예술가와 공동 작업해 완성한 <마지막 장소>는 얼음이 주인공이다. 녹아서 사라지는 큰 얼음 입방체와 그것이 놓인 주변 환경과의 교감을 섬세하게 포착했다. 이 영상은 공간을 채우는 일뿐만 아니라 지우는 일도 건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다이아거날 써츠의 두 영상 작품 모두 무언가를 짓기보다 짓지 않는 행위를 통해 가능한 건축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프로젝트. 미술관 정문 정류장. 박수환 제공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프로젝트. 미술관 정문 정류장. 박수환 제공

파빌리온: 가구와 같은 건축 장치

김사라는 건물을 짓는 것만이 건축가의 직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체로 이런 생각에 동의하는 건축가라도 시간이 흐르면 건물 짓기에 주력하지만 그의 행보는 달랐다. ‘비스듬한 사고(Diagonal Thoughts)’를 뜻하는 사무소 이름대로 그는 정직한 직진이 아니라 다른 목적지를 향해 뻗어가고 있다.

김사라는 지금 한국 건축계에서 이른바 ‘파빌리온(Pavilion) 계열의 건축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구마 겐고는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예술 세계의 전시나 공간 구성을 통해” 자기 재능을 드러내는 젊은 건축가들을 파빌리온 계열의 건축가라고 명명했다.

김사라는 최근 몇 년간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도시건축전시관,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등 여러 예술기관에서 지명 공모 작가로 초대받았다. 게다가 최근 개방된 서울 송현동 공원 부지에서 열리는 2023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의 현장 프로젝트 기획자로 발탁됐다.

그는 ‘체험된 노드, 수집된 감각’이란 제목으로 국내외 작가들과 파빌리온을 구상 중이다. 정자와 같은 임시 구조물을 뜻하는 파빌리온은 지난 10년간 한국 미술계가 건축가와 협업해온 중요한 전시 갈래다. 주로 미술관 유휴 공간에 건축가가 새로운 장소 맥락을 끌어내고 유용한 기능을 담은 공간을 만드는 작업이다.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는 김사라의 여러 제안 중 실제 구현된 최근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위하여 설치됐다. 미술관 공간 재생 일환으로 진행 중인 ‘MMCA 과천 프로젝트’의 2021년 주제인 예술버스쉼터 선정작으로 진행됐다. 이 작업은 서울 지하철 4호선 대공원역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잇는 3개의 셔틀버스 정류장을 바꾸는 것이었다. 파빌리온으로는 드물게 5년 이상 장기 사용을 고려해 계획됐다. 정류장은 미술관 방문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중요한 곳이지만 예전 이곳은 낡고 경직되어 있었다.

김사라는 정류장을 단순한 통과 장소가 아니라 미술관 공간 경험의 출발점으로 봤다. 머무는 동안 일어날 수 있는 대기 관객의 다양한 신체 움직임을 연구하고 그에 부합한 공간 형식을 고안했다. 그 결과 정류장은 건축가가 구상한 여러 움직임을 담는 공간 요소가 구현된 커다란 가구처럼 느껴진다. 작품 이름처럼 건축보다 조각, 공예, 가구로 명명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실제 이곳은 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가구에 가까운 섬세한 디테일을 갖고 있다. 기대거나 앉는 다양한 신체 경험을 세심하게 조율한 결과다. 그에게 가구란 몸이 닿는 건축적 장치라서 건축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기다리는 설렘이 몸이 닿는 좋은 감각으로 자연스레 이어지도록 마감을 비롯한 제작 완성도를 높여야 했다. 알루미늄, 탄화목 등 외장재로 잘 쓰지 않는 재료의 물성을 시각적·촉각적으로 잘 드러냈다.

김사라

김사라

재료의 물성과 소통 매체

그가 이와 같은 건축적 장치에 관심 있는 것은 독립하기까지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김사라는 학부에서 건축이 아닌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미국 로드아일랜드디자인스쿨(RISD)에서 배운 건축은 공학보다 예술에 가까웠다. 뉴욕 오브라아키텍츠에서 실무를 하고 서울로 돌아와 2015년 다이아거날 써츠를 열기 전까지 건축가 조병수가 이끄는 BCHO파트너스에서 일했다. 조병수의 사무실에서 그는 물성을 최대한 끌어내는 재료 사용 방식과 공간의 감각적 구축 방식을 자주 접했다. 같은 모양의 건물이라도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공간과 나무로 만든 공간이 전달하는 힘이 각자 다르다. 같은 재료로 만든 공간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만듦새의 작은 차이들을 알고 사람들도 알게끔 하는 것이 건축가에게 중요한 연구 과제다.

김사라는 결과물의 소통 매체로 도면을 내세우지 않는다. 도면은 건축의 기호이자 지식체계로 중요하지만, 사진·영상 같은 시각 매체가 대중과 소통하기 쉽고 공간 분위기나 건축가의 메시지를 더 잘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사진과 영상은 건축가 작업을 그냥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또 다른 예술 매체로 호소력을 갖는다. 이를 위해 그는 평소 문화예술계에 관심을 두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작가들과 잘 협업한다. 이런 과정이 자연스레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그의 활동 범위를 넓혀준다.

그가 설계한 건물 준공 사진은 대체로 공간의 객관적인 정보를 담지 않는다. 건물 용도나 전체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운 모호한 장면이 많다. 특정한 디테일이나 풍경의 파편에 주목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의 작업 사진을 보고 공간을 실제 방문했을 때 사뭇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차이와 낯선 느낌 자체가 공간을 재차 보게 만든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대부분 일상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으니까 의도적으로 어떤 장치를 통해서 사람들이 인식하게 만드는 부분에 관심 있다”고 말했다.

은평구립도서관 4차산업 체험센터 복도 모습. 박수환 제공

은평구립도서관 4차산업 체험센터 복도 모습. 박수환 제공

디지털 공간으로 사고를 확장하다

“사고나 경험의 반전”을 통해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는 것에 집중하는 그의 작업은 자연스레 디지털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코로나 이후 디지털 기술이 생산하는 온라인 공간들은 물리적인 공간만큼 중요한 탐구 대상이 되었다. 건축을 새롭게 정의해온 김사라에게 온라인 공간 연구는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은평구립도서관 4차산업 체험센터는 이를 실천해 본 작업이다. 은평구립도서관 지하층을 리모델링해 지난 6월 개방한 이곳은 디지털 문해력 향상을 위한 교육 공간이다. 예산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공공도서관 일부를 새로운 지식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은 의미 있었다. 그는 먼저 일반적인 공공건물에서는 보기 힘든 군청색 페인트로 긴 복도를 마감했다. 이 통로에 들어서면 마치 다른 차원의 장소로 시간여행을 온 느낌이다. 이 복도를 만든 다음 공간에 불필요하게 붙어 있던 부차적인 것들을 덜어내고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 소프트웨어 기반의 4차산업이 잘 가동될 수 있는 건축 공간은 역설적으로 사유가 가능한 빈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도 건물의 적극적인 개조보다 가구적 접근을 시도했다. 기둥과 같은 기존 구조체를 이용한 가구, 복도에서 대화와 토론 활동을 유도하는 가구, 도서관의 기존 질서를 잡아주는 가구 등으로 전개되었다.

단단한 건물에 대응하는 유연한 저항

<마지막 장소>, <쓸모없는 건축과 유용한 조각에 대하여>, 은평구립도서관 지하층 리모델링까지 영상·설치·인테리어를 넘나드는 김사라의 작업은 건축의 기념비성을 슬쩍 비튼다. <마지막 장소>도 궁극적으로는 공공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거대한 것을 만들고 싶지 않은 건축가의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이를 “공공예술 조형물에서 느껴지는 어떤 절대적인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고 설명했다.

나머지 두 작업 또한 산속 성채처럼 보이는 국립미술관과 언덕 위 성전처럼 보이는 구립도서관에 기존 건물과는 완전히 다른 건축 언어로 대응하고 개입한 결과다. 건축가 김태수가 설계해 1986년에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과 곽재환이 설계해 2001년에 문을 연 은평구립도서관은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웅장하고 단단한 건물이다.

김사라는 선배 건축가가 만든 기존 건물을 존중하면서 공간을 새롭게 읽고 몸짓처럼 연약하지만 유연한 건축 요소로 대항한다. 1980년대 말에 세운 현대 건축물도 철거나 리노베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남이 설계한 집들을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건축가들에게 더 중요해질 것이다. 빈 땅보다 기존 건물 위에 건축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오늘날, 김사라의 말대로 공간을 보고, 생각하고, 다시 받아들이는 인식 과정의 다양한 차이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

나는 김사라와 대화 중간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에서 소설가 대니 샤피로가 인용한 소설가 매럴린 로빈슨의 구절을 떠올렸다. “문화가 예술가를 귀하게 여기는 건 그들이 저걸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라는 건 베르사유 궁전이 아닙니다. 햇살 한 줄기가 비친 벽돌 벽이죠.” 이 글처럼 김사라가 말하는 건축은 건물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재료의 본질과 더불어 빛, 바람, 소리, 몸짓처럼 형태 없는 것을 포함한다. 그가 가리키는 건축의 또 다른 의미를 따라 건축의 아름다움과 취약함 사이를 가로질러 본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남이 설계한 집’으로 건축의 아름다움과 취약함을 말하다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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