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란 무엇인가 | E. H. 카

일제강점 말기의 초등학생 때는 우리 역사를 전혀 배우지 못했다가 해방 직후 중학교에 들어가서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우리 역사학 전공자가 되었다. 이때부터 비로소 사실만을 나열한 역사가 아닌 역사이론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헤겔이나 베른하임 등을 읽었지만 그래도 널리 알려진,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카의 저서에서 가장 많은 ‘역사의식’ 같은 것을 얻은 것 아닌가 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유명한 명제는 신출내기 역사학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카가 역사를 말하면서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춰졌을 때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현재도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한 대목도 당시의 단순 사실 나열주의적 우리 역사학 풍토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가진 젊은 역사학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카의 역사이론에 심취했던 젊은 역사학도는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역사는 인류사회가 추구해 마지않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라는 나름대로의 명제를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라는 것은 다소 소극적 표현이라 할 ‘현재와 과거의 대화’를 넘어 이성적 동물로서 인간사회가 한층 나은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기 위해 끊임없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서 기어이 이루어내고 마는 그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라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