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자의 말 듣는 게 우선”…“들어줄 수 있는 사회 만들어야”

2018.04.01 21:09 입력 2018.04.01 21:13 수정

‘다크챕터’ 작가 위니 리 방한, 여성학자 권김현영과 대담

성폭행·법정 투쟁 경험 소설화…상처는 회복됨 알리려고 쓴 것

가해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온정주의로 피해자 대해선 안돼

미투가 지속적인 운동 되려면 법 개정·피해자 지원정책 필요

펜스룰 대두는 터무니없는 것…한국 남성, 불평등 현실 잘 몰라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성폭행 경험을 담은 자전소설 <다크챕터>의 작가 위니 리(왼쪽)와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성폭행 경험을 담은 자전소설 <다크챕터>의 작가 위니 리(왼쪽)와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대만계 미국인 작가 위니 리는 2008년 어느 날 삶이 부서지는 듯한 경험을 한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에서 영화제작자로 활약하던 중 북아일랜드 벨파스트로 하이킹을 떠났다가 15세 소년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리는 숨죽이는 대신 경찰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고, 법정에서 정의를 쟁취한다. 소년은 강간 혐의로 중형을 선고받는다.

리의 이야기는 ‘특례’에 가깝다. 한국 실정에 비춰볼 때 예외성은 더 두드러진다. 성폭력 피해 신고율이 2%에 못 미치고, 가까스로 피해를 알리더라도 오히려 무고죄나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당할 가능성이 크다. 리는 ‘강간을 당했다’고 알린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로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았지만, 대다수 피해자들은 오히려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눈치를 본다.

그럼에도 그의 자전소설 <다크챕터>(한길사)는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MeToo)’ 운동의 한복판을 지나는 우리 사회에 보편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바로 여성이라면 누구나 성폭력에 노출될 수 있고, 피해자가 용기를 내 증언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어판 발간을 기념해 방한한 리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순화동천에서 여성학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와 만났다. 한국과 서구에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두 사람은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미투 운동은 제도적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강간 이후의 상황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

사회(김유진 기자) =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위니 리(리) = 소설을 쓰기가 고통스러웠지만 내가 겪은 경험, 2008년의 사건 그리고 2009년까지 이어진 법적 절차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소설은 주인공 비비안과 조니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그들만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강간, 그리고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현실적으로 조명하고, 피해자들이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다.

권김현영(권김) = 연구자로 성폭력을 주제로 한 여러 권의 책을 썼지만, 늘 소설의 형태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 책은 피해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과 상황을 겪는지, 법정이나 병원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읽고 싶도록 묘사했다.

사회 =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점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서사를 구성한 의도는.

리 = 조니와 같은 폭력적인 강간범의 삶에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범죄에는 이유가 있다. 성폭력을 마치 없는 현상처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가해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인간이 아니고 정상이 아니므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이는 무고한 희생자들의 피해를 야기한다. 개인적으로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가해자의 이야기를 보는 작업이 필요했다.

권김 = 한국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가 강력하다. 가해자의 계급이 피해자보다 낮으면 ‘너가 가진 게 많잖아’라며 비난하기도 한다. 혹시 비슷한 상황에 처했나.

리 = 몸 전체에 상처와 멍이 있었고, 고학력 여성이기에 증언이 과장됐다고 의심하는 반응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다수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피했어야 한다는 시선을 받았다. 나 역시 스스로를 비난했고 화가 난 적도 있지만, 성폭력은 피해자 잘못이 아니다. 100% 가해자 잘못이다.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회가 우선”

권김 = 교육받은, 사회적 지위가 있는 여성이 이야기하면 더 믿어주는 분위기가 있다. 당신 역시 아직까지 말하지 못한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소설을 썼고 페미니스트들의 플랫폼 ‘클리어라인스 페스티벌’을 만들었는지.

리 = 여러 이유로 침묵하는 여성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들과 연대하고 싶었다. 예술가이기도 한 피해자들이 페스티벌에서 그 경험을 그래픽노블, 만화, 단막극, 시, 영화, 시각예술, 스탠딩코미디 등으로 만들어 선보였다.

권김 = 한국은 2003년부터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여성들은 직접 경험을 이야기하기보다 노래나 책, 뮤지컬, 코러스대회 등 다양한 예술적 형태로 말했다. 페스티벌과 비슷하다. 어쩌면 그 사건이 당신이 영화제작자에서 작가로, 또 아트디렉터로 성장하는 터닝포인트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리 = 사건 이후 여성혐오적인 영화계로 돌아가기가 불편했다. 또 예술 분야는 고용 불안정성이 심각하다. 카타르와 싱가포르에서 다시 영화 관련 일을 했는데, 재정적으로는 안정됐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지금은 불안정해도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어 만족스럽다. 첫 소설은 강간에 대해 썼지만, 앞으로 다른 주제도 다루고 싶다. 한편으로는 만약 이 사건이 없었다면 다른 에너지로 더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공평하지 않다.

사회 = 소설은 성폭력 생존자가 침묵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리 =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하는 것, 비난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경험하지 않았다면 ‘나라면 이렇게 했어’라고 코멘트해서는 안된다. 성폭력은 피해자에게는 엄청난 충격이고, 스스로 인지하기까지는 수일,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 순간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죽지 않기 위해 얼어붙기도 한다.

권김 = 피해자가 말하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 문제다. 피해자가 왜 말하지 않냐고 하기 전에 들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또 피해자를 비난하는 2차 가해 문화에 맞서 싸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에 사로잡히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피해자 보호를 이유로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나서서 존재를 걸고 말할 때는 특별한 힘이 발휘된다. 최근 펴낸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교양인)에 이런 고민들을 담았다.

리 = 가부장적, 온정주의적 태도로 피해자들을 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고, 더 나은 정책을 제안할 수 있다고 믿는다.

■미투와 그 이후

사회 = 최근 한국을 포함해 세계를 달구는 미투 운동을 어떻게 바라보나.

권김 = 여성들의 집단적 이어 말하기라는 놀라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나 피해자에 대한 압력은 여전하지만, 한국 여성들의 마음이 변했다. 앞으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래도 변하지 못하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미투가 구체적인 사회 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리 = 미투가 지속적인 유산으로 남으려면 제도적·구조적 변화가 중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법 개정, 성폭력 인식 제고를 비롯해 직장 내 피해자 지원 정책 확립이 필요하다.

권김 = 미투의 반작용으로 ‘펜스룰’이 대두하고 있다. 여자와는 일하고 싶지 않고, 여성을 뽑지 않겠다는 움직임이다. 한국 남자들은 ‘자기방어’라고 한다.

리 = 터무니없게 들린다. 하지만 변화는 직선 방향으로 오지 않고, 언제나 반격(backlash)이 있다. 미국과 영국에는 극우 지지자들과 좌파 지지자들이 공존하며 정치적으로 활발한 목소리를 낸다. 한국은 어떤가.

권김 = 진보정권이 들어섰지만, 지지자들은 여성 문제에 관해 매우 보수적이다. 경제위기 이후 20년 동안 남성들이 이전과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여성들이 겪는 불평등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리 = 시민사회의 존재 의의와 맞닿아 있는 문제다. 누구나 안정적으로 기회를 누리는 사회를 만들 것이냐, 아니면 개인만의 이득을 추구할 것이냐고 할 때 대개 진보는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권김 = 보수정권을 거치며 시민사회가 붕괴되다시피 했다. 남성들이 권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길이 여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되어버렸고, ‘페미니스트 불링(feminist bulling)’이 확산됐다. 최근 한 게임회사는 여성단체의 온라인 계정을 팔로했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계약을 해지했다.

리 =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나. (비정규직이라 어렵다고 하자) 그래서 제도적 변화가 중요하다. 여성들의 삶이 참정권도 갖지 못했던 10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고용 불안정, 성별 임금격차, 성폭력 등과 싸우고 있다.

권김 = 소설에서 가해자 조니가 어린 나이에 강간 문화에 노출되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억울하게 느끼는 것을 잘 묘사했다. 한국 인터넷 ‘남초’ 커뮤니티에도 비슷한 정서가 있다.

리 = 조니는 극단적 사례이다. 하지만 빈번한 성폭력을 근절하려면 남성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원인에는 포르노 문화의 확산, 뿌리 깊은 가부장제, 또는 여성과의 접촉이 적어서 등 다양하다.

권김 = 한국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친구나 동료로서 우정 어린 관계를 맺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젠더전쟁’과 같은 현상까지도 나타나고 있다.

리 = 서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더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이나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이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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