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차이와 억압의 교차성 통찰한 ‘페미니즘 경전’

2018.08.17 20:42 입력 2018.08.17 20:46 수정

시스터 아웃사이더

오드리 로드 지음 |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 365쪽 | 1만8000원

오드리 로드가 ‘여성은 강력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라는 글자가 쓰인 칠판 앞에 서 있다. 로드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서로의 투쟁의 가장자리(The Edge of Each Other’s Battles)>(2002)의 한 장면.

오드리 로드가 ‘여성은 강력하고 동시에 위험하다’라는 글자가 쓰인 칠판 앞에 서 있다. 로드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서로의 투쟁의 가장자리(The Edge of Each Other’s Battles)>(2002)의 한 장면.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회운동의 구호로 이따금 울려퍼지는 경구들을 낳은 이는 미국 시인 오드리 로드(1934~1992)다. ‘페미니스트들의 페미니스트’로 불리는 그의 산문들을 모은 1983년 저작 <시스터 아웃사이더>가 국내에 드디어 상륙했다.

1970~1980년대 미국은 민권운동과 페미니즘의 성과가 어느 정도 축적된 상태였다. 하지만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흑인 남성은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외면했고, 성차별 철폐를 부르짖는 백인 여성들은 유색인 여성이나 레즈비언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차이보다는 동일성을 강조하는 운동 진영에서 ‘흑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라는 로드의 정체성은 늘 공격의 대상이 됐다. 겉으로는 자매(sister)로 불렸지만, 실은 영원한 아웃사이더(outsider)였다. 로드는 여성들 앞에선 흑인으로, 흑인들 앞에선 여성으로, 이성애자들 앞에선 레즈비언으로 쉼없이 분투했다. 이 책은 한 예외적이고 용감한 여성의 뜨거운 육성을 담고 있다.

1979년 9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출간 3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 초청받은 로드는 “인종차별적 가부장제의 도구로 인종차별적 가부장제가 낳은 결과를 성찰한다는 건 대체 무슨 뜻입니까?”라고 묻는다. 800여명의 페미니스트들이 모인 자리에 흑인과 레즈비언의 문제를 다루는 세션이 고작 한 개였음을 두고 한 말이다. 그는 “차이는 우리의 창의성이 불꽃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극성”이라며 차이를 무시하는 백인 페미니스트들의 태도를 맹렬하게 비판하고는, ‘주인의 도구’라는 신랄한 비유를 한다. “주인의 도구로 그가 만들어 놓은 게임 안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습니다.” 그는 “우리가 만들 세상에서, (이제껏 우리를 통제해 온) ‘분할해 다스리라’는 지배 전략은 우리 스스로를 정의하고 힘을 기르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라고 외친다.

‘침묵’을 언급한 무대는 1977년 미국 현대어문학협회 학술대회다. 그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을 수도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여성들이 가시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지만, 그 두려움마저도 발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들이 내 말 좀 들어 달라고 울부짖는 곳에서, 우리는 이들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찾아내 함께 읽고 서로 나누며, 그 말이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자기 경험의 언어화는 로드가 거듭해서 돌아오는 주제이다. 뉴욕의 서인도제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열두 살 때부터 시를 썼고, 시를 쓰면서 레즈비언 정체성을 확립했다. 그는 가장 애착을 보인 글의 하나인 ‘시는 사치가 아니다’에서 “시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우리의 생명줄이다”라고 적는다. 동시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느낀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롭다”고 하는 우리 내면의 시인의 말을 따를 때 혁명이 일어난다고 한다.

[책과 삶]차이와 억압의 교차성 통찰한 ‘페미니즘 경전’

뉴욕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서로 일했던 그는 게이 남성과의 사이에서 얻은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했다. 그는 자매애를 운운하며 차이를 지우려는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에 맞서 싸우면서도, 곳곳에서 자매애의 씨앗을 뿌리는 데 앞장섰다.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한편 유색 여성들을 위한 출판사 키친테이블을 운영했고, 아파르트헤이트하의 남아공에서 여성들을 조직화했다.

“레즈비언 공동체에서 나는 흑인이고, 흑인 공동체에서 나는 레즈비언이다. 억압에 위계란 없다.” 로드는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의 ‘교차성’을 그 어떤 곳도 아닌 스스로에게서 끌어낸다. 1980년대까지 서구 페미니즘 이론은 젠더 외에도 인종이나 계급, 섹슈얼리티, 시민권, 학력, 나이 등 여러 변수들이 여성들에게 억압을 가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드는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인종차별, 계급차별 등과 맞물려 작동하며 서로를 강화한다고 봤다. 그가 강한 애착을 드러낸 또 다른 글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며’는 한발 더 나아가, 지배의 감정적 동학에 집중한다. 즉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 인종차별 등을 떠받치는 심리 구조가 흑인 여성 혐오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1982년 하버드대에서 한 ‘1960년대로부터 배울 점’이라는 연설에서 여성과 동성애자의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흑인 운동가들을 향해 “우리가 단결하기 위해 균질화된 초콜릿 우유처럼 구별 불가능한 입자의 혼합물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생각과 표현과 방법이 다른 걸 견디지 못하고 상대를 절멸시켜 버리겠다는 협박이 저항의 언어로 인기를 끌게 된”(권김현영)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는 더 각별하게 다가오는 말이다.

수년째 이어져 온 페미니즘 도서 붐이 최근에는 페미니즘 고전 출간으로 대체되는 모양새다. 수전 팔루디의 <백래시>, 수전 브라운밀러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가 수십년 만에 번역됐고,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도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흑인이나 레즈비언 등 겹겹의 소수자성을 지닌 여성들의 목소리는 결여돼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갈증을 해갈하기에 충분하다. 후마니타스 출판사가 언어화되지 않은 여성들의 목소리를 소개하겠다는 각오로 시작한 ‘딕테’ 시리즈 첫번째 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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