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인권 위에 있지 않다" 여성으로 글쓰기 답 찾아가는 '페미니스트 작가' 윤이형

2019.01.22 13:11 입력 2019.01.22 15:13 수정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소설가’로 여성 서사를 선보이고 있는 소설가 윤이형을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결혼제도의 폐해와 대안을 그린 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소설가’로 여성 서사를 선보이고 있는 소설가 윤이형을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결혼제도의 폐해와 대안을 그린 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로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앞으로 쓸 내 소설에서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순응하거나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하는 여성이 나와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는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이기 때문에 앞으로 여성에 대한 어떤 멸시나 비하도 ‘현실 그대로’ 작품 속에 재현하면 안 되는 것일까?”(‘문예중앙’ 2017년 여름호 ‘여성에 대해 쓰기: 너무 많은 질문들과 약간의 대답’)

소설가 윤이형(43)은 스스로에게 이같은 질문을 던졌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폭로가 이뤄졌던 직후였다. SF·판타지 등 장르적 요소를 도입한 개성있는 서사로 ‘젊은 작가’로 주목받았던 윤이형은 이제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작가’로 자신을 규정하며 이전과 다른 문학을 할 것을 선언한 것이다.

그가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이 고민에 대한 답변과도 같다. 2017년 말 펴낸 장편소설 <설랑>에서 여성과 여성의 사랑을 그린 퀴어 서사를 선보였고, 지난해 말 발표한 중편소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고양이’)에선 결혼제도의 폐해를 파헤치고 대안을 모색했다. ‘고양이’는 2019년 이상문학상 대상에 선정돼 주목받았다. 윤이형은 대부분의 (여성)작가들이 했을 고민을 공개적으로 털어놨고, 이에 대한 답을 소설로 써내고 있다. 그의 행보는 한국문학의 변화를 보여준다. 지난 15일 서울 중구 정동 경향신문사에서 윤이형을 만났다.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창작자’가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문제에 대해 자각하게 됐어요. 40년 동안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살다가 처음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 거예요. 혼란스럽던 차에 문단 내 성폭력이 터졌어요. 가치관이 많이 흔들렸죠. 내가 몸 담았던 문학계의 환경이라는 것이 척박했구나, 단순히 먹고 살기 어렵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명백한 폭력이 발생했는데 숨겨지고 있었어요. 자의가 아닌 타의로 글쓰기를 그만두게 된 여성들이 많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어요. 충격을 받았고 여러 모로 힘들었어요.”

-고민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열심히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글쓰기 자체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문학이 굉장히 소중한 것이지만 너무 많은 의미를 두고 칭송하다보면 인간의 생활, 인권 위로 올라가더라고요. 문학이 아주 대단하다는 생각을 믿지 않게 됐어요. 그냥 글이에요.”

-동료 작가들과 이런 고민을 함께 나눴나요.

“다들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그런 기미가 있는 자리는 안 나가고 피해왔어요. 피해자이면서 사실은 방조자의 위치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괴로워하고 있어요. 성폭력이 이슈가 된 이후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게 정말 많아요. 개인 대 개인으로 돌아가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외롭게 싸우고 있고, 정책과 제도가 바뀌고 따라와야 하는데 잘 안 되고 있죠.”

-작품에 변화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준거집단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 건 변화입니다. 여성 독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잘못 쓰지 않을까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여성의 몸에 관심이 많아요. 나이가 드니 몸에 대한 이물감이 커지고 변화들이 일어나는게 스스로 즐겁지가 않더라고요. 예전엔 ‘이런 이야긴 우울하니까 사람들이 안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사람’이란 게 남성의 시선이었던 것 같아요. 좀더 여성의 현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말하게 된 것 같아요.”

소설가 윤이형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소설가 윤이형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고양이’는 결혼 안에 놓인 두 남녀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드러내면서 대안을 모색한다. 윤이형은 “‘정상가족’을 이루고 싶어 무리하게 결혼한 커플의 이야기를 통해 지금 사회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이 지속 가능한지,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것”이라고 답했다. 윤이형은 “기혼여성으로서 한계와 분열을 느끼지만 내 자리에서 고민을 계속하고 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젊음 이후 중년을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는 많지 않은 것 같아서 중년 여성으로서의 내가 많이 투영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소설 속에서 남자 정민은 생계를 위해 꿈을 희생하고, 이혼 후 자기 자신을 찾아갑니다. 희은은 각종 자격증을 따고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준비합니다. 그런 결말을 그린 이유는요.

“결혼 자체에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해요. 가정 내에서 성역할을 바꾸고 가사분담을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될 거 같지 않았어요. 아무리 선량한 개인들을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아도 억압하는 구조의 힘을 이겨내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희은의 경우 이혼 후 독립하기 위해선 자본을 마련해야 하지만 좋은 일자리가 없고 노동환경도 나쁘죠. 그래서 유자녀인 여성은 결혼에 모순을 느껴도 바로 이혼하기가 힘들어요.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덮고 지나가지 않고 갈등을 끄집어내 이혼을 선택하는 것은 여자인 희은 쪽이고, 저는 그게 적극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해 여성 작가들의 여성 서사가 독자와 평단으로부터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같이 성장하는 여성들이 있고, 그걸 보는 것 자체가 힘이 되는 느낌이에요. 전 이미 기성세대이지만 멋지고 에너제틱한 젊은 여성들이 많고, 굉장히 훌륭한 여성 동료들이 많이 있어서 힘을 얻습니다.”

-결혼과 육아가 작가로서의 삶에 영향을 미쳤나요.

“긍정적 부분도 많아요. 저는 창작과 생활이 서로 대립되지 않고 도와주는 관계에요. 생활을 희생시키고 못살게 굴면 글도 잘 안 써져요. 시간이 부족한 것은 감당해야 하는 문제에요. 제가 선택한 삶이니까요. 어쩔 수 없이 이쪽도 잘 못하겠고 저쪽도 잘 못하겠긴 하지만 반반씩 만족하고 있어요. 늘 부족하다는 느낌이 있지만 두 개 다 해야하니까, 다 하려고 생각해요. 늘 시간이 부족하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갔을 때, 밤에, 또 마감 직전에 주로 글을 씁니다.”

-요즘 어떤 책을 읽으세요.

“비문학 쪽을 많이 읽고 있어요. 페미니즘 책도 읽고 영화도 다큐 쪽으로 보게 되요. 픽션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옛날엔 환상과 같은 요소를 많이 넣어서 글을 썼는데 지금은 눈 앞의 현실이 압도적으로 참혹하기 때문에 환상 보다는 실재하는 것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앞으로 쓰고 싶은 소설이 있다면요.

“그때 그때 절박한 고민을 쓰는 편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지금 쓰고 있는 중편소설은 여성들의 우정에 관한 얘기에요. 여성들이 같이 억압받고 있는데도 동지로 보기 보다는 서로의 고통과 억압을 비교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서로 미워할 필요가 없고 힘을 합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또 우에노 지즈코의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를 읽었는데, 기혼과 비혼 페미니스트가 서로 입장에서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를 보여주면서 대화하는 게 흥미로웠어요.”



■윤이형 소설 속 문장들

결혼이 남미의 오지로 떠나는 위험한 여행이라면, 아이의 양육자가 되는 일은 우주선에 탑승해 미지의 행성에 정착하기 위해 떠나는 것과 같다. 앞서간 여행자들의 데이터는 제대로 전송되어 오는 법이 없으며 우주선 안에서는 시간이 지구에서와 다르게 흐른다.

대체 왜일까. 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각자 곰곰이 생각했다.…왜 국가는, 부모의 세계라는 우주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곳이니 모두 함께 가자는, 승무원이 되면 혜택을 주겠다는 모객 광고를 조잡한 팸플릿에 인쇄해 수없이 뿌려대면서 그 우주가 어떤 곳인지, 승무원 생활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것일까


희은은 언젠가 침대에 누워, 결혼을 고발하고 싶어, 중얼거린 적이 있었다. 정민 씨, 결혼이라는 놈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피고인석에 세우고 싶어. 원고는 우리 둘이고. 대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하나하나 따져 묻고 싶어. 그런데 그 결혼이라는 작자는 우리 아기를 인질로 잡고 서 있지.


그는 희은이 자신의 서러움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 역시 희은이 느끼는 불신과 공포의 크기를, 그 공포가 얼마나 구체적인 것인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이제 서로를 미워하지. 서로의 고통마저 미워서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 하잖아. 하지만 정민 씨, 우리는 결혼이 아니야. 결혼을 했을 뿐이지 정민 씨도, 나도 결혼이 아니잖아. 우리가 미워해야 하는 것은 서로가 아니고 제도야.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자신 안에 그런 부비트랩이 묻혀 있을 줄은 몰랐다. 두 번이나 복직 기회를 포기하고 남편에게 모든 걸 양보하는 동안 매설되고 정비되고 업그레이드된 거대 살상 무기였다. ‘이기적’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마지막 이성이 퍽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일을 다시 하기 위해 자살극까지 벌여야 하다니, 지혜는 어이가 없었다.


왜 나는 이것도 저것도 잘해내지 못할까. 이렇게 쪼개질 것처럼 피로하고, 아이까지 미친 척 떼놓았으면, 보람이라도 좀 있든지, 즐겁든지 해야 하는 거 아냐?


본의 아니게 이것도 저것도 결국 잘해낼 수밖에 없게 된, 사실은 하나도 부족하거나 무능하지 않은 여자들끼리 그런 일로 연락을 그만두게 되기도 한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가.


세상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공평함에서 시작된 성난 마음을 딛고 언제가 되든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을, 서로를 조금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기를 바라며. (‘여성의 신비’ <멜랑콜리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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